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4일

서진룸살롱 집단살인 사건

산풀내음 2017. 7. 8. 21:49

1986 8 14,

서진룸살롱 집단살인 사건

 

1986 8 14일 밤 서울 강남의 한 룸살롱에서는 마치 조폭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잔인한 장면이 펼쳐졌다. 일단의 건장한 20대 청년들이 야구방망이와 회칼을 휘두르며 또 다른 한 무리의 청년들과 집단 난투극을 벌였던 것. 룸살롱 내부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해버렸고 이 와중에 4명이 끔찍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5공화국 말 우리 사회를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일명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은 ‘조직폭력배들의 치열한 이권다툼’ ‘복수와 응징으로 점철된 어두운 조직세계의 단면’ 등의 제목으로 연일 매스컴을 장식했다. 탈법적인 삼청교육을 강행할 만큼 ‘민생치안’을 정권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던 5공 정권에겐 곤혹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사건 직후 정부는 전국 경찰에 폭력배 일제 소탕령을 내렸고 주먹세계에는 거대한 검거 회오리가 몰아치기도 했다.

 

1986 8 14일 밤 10 30분경 서진룸살롱 20호실에서는 정요섭, 장진석, 고금석, 김동술 등 일명 ‘서울 목포파’ 12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같은 시각 17호실에서는 조원섭, 고용수, 송재익 등 이른바 ‘목포 맘보파’ 7명이 교통사고를 낸 뒤 실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그날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조직원 고용수(28)의 석방을 축하하기 위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서울 목포파는 유도대학 선후배로 구성되어 있었고 모두 생선회 칼과 야구 방망이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반면, 길거리 싸움꾼들로 구성된 목포 맘보파 일행은 전혀 무기를 휴대하지 않은 맨손 상태였다. 사건이 발생한 서진회관은 서울 목포파에서 보호하고 관리하던 업소였고, 김태촌의 범서방파 방계 조직으로 강남 일대에서 세력을 과시하고 있던 목포 맘보파 일행은 서울 목포파를 무시하고 서진회관을 축하 파티 장소로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전남 목포 출신으로 평소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술 시중을 들던 남자 종업원의 태도가 기분 나쁘다며 맘보파 일행 중 한 명이 마구 폭력을 휘둘렀고 구타당한 채 울면서 방 밖으로 나오던 종업원을 화장실에 다녀오던 서울 목포파 조직원이 발견하고 이유를 따져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평소 자신들을 무시하던 맘보파 일행이 자기네 구역에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밀고 들어와 맘 놓고 술을 마시는 것도 마땅찮은 데, 동생 같은 종업원을 구타하기까지 하자 분노했다.

 

유독 목소리가 큰 서울 목포파 고금석이 목포 맘보파 조원섭의 측근들과 욕을 하며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가 20호실 문 너머로 들려왔다. 방에 있던 김동술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김동술이 돌아오지 않자 또 다른 몇몇이 따라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일행이 돌아오지 않자 서울 목포파의 선임자 격인 장진석이 밖으로 나섰고 일행으로부터 “별 일 아니다. 원섭이 애들이 먼저 때렸다”는 말을 듣게 된다.

 

서울 목포파 일원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분명히 자신들보다 실전 경험도 많고 센 상대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주저했다. 특히, 맘보파의 행동대장 조원섭은 일대에서 유명한 싸움꾼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갑론을박과 계획, 작전을 거듭한 끝에 종업원들을 통해 맘보파가 무기 없이 무방비 상태로 술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칼과 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마음을 다잡고 무기를 손에 든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17방의 문을 열어젖히고 소리를 지르며 난입해 들어갔다. 닥치는 대로 칼과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특히 그들이 가장 무서워한 조원섭을 향해 공격이 집중되었다. 맘보파 조직원 7명 중 조원섭, 고용수 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나머지는 중상을 입었다.

 

 

김동술 등은 4구의 시체를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싣고 현장으로부터 약 8㎞ 떨어진 사당동의 한 정형외과에 버리고 달아났다. 당시 목격자와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이들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자 4명을 들쳐 업고 정형외과에 뛰어들어와 2명은 1층 계단에, 나머지 2명은 2층 수술실 앞에 던져놓고 “교통사고 환자”라고 외친 뒤 사라졌다고 한다.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건 이틀 후 조직의 우두머리 격이던 정요섭 등 7명이 자수를 해왔고 주범인 장진석과 김동술 등 나머지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의 작은 섬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검거됐다. 유혈 참극이 벌어진 지 4일 만에 사건이 해결된 것이다. 8 22일 경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했고, 관련자 12명은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서진룸살롱 사건으로 검거된 범인들 앞에 104점의 압수된 무기와 증거물들이 놓여 있다.

체포된 두목 장진석(), 체포 당시 여유로워 보였던 이들은 취조실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며 조사 내내 울기만 했다고 한다.


서진회관 입구에서 울분을 토하는 피해자 유족들. 그러나 피해자도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가해자였다. 그들도 지옥에서 참회하기를 기도한다.

 

1987 10월 주범 김동술, 고금석은 사형, 김승길, 장진석은 무기징역 그리고 나머지 조직원들에게는 각 가담 정도에 따라 유기징역 형이 내려졌다. 그리고 사건 발생 3년 만인 1989 8 14일 김동술과 고금석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고금석은 법정 사실심리에서 모든 범행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진술, 선배인 장진석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치소 내에서 불교에 귀의해 27세에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자신의 영치금과 사역비를 불우한 재소자나 나병환자 등에게 내줄 정도로 거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후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안구와 콩팥을 기증했다는 사실이 한 교도관을 통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던졌다.

 

또 다른 주범 김동술도 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옥중에서 가톨릭에 귀의, 짧지만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그는 참회의 나날을 보내다가 “주여, 이 몸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외치며 26세의 나이에 사형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