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5일

대한민국, 일제로부터 해방

산풀내음 2017. 7. 9. 05:50

1945 8 15,

대한민국, 일제로부터 해방

 

8월 6 히로시마이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틀 후인 8월 8일에는 소련이 “9일부터 일본과 전투상태에 돌입한다”는 짤막한 선전포고가 있었고 9일 0시를 기해 만주지역에 진격하였다. 9일 아침 8시 30분부터 일본 수뇌부는 포츠담 회담 선언의 수락을 전제로 한 최고 전쟁책임자 회의를 가졌다. 한참 논쟁이 오가는 중인 9일11시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결국 8월 13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 결정되었고 8월 14일 히로히토(1901-1989) 일본 왕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1945년 8월15일 정오, 일본 왕의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일본 전역에 울려 퍼졌다. 패전과 항복의 조곡(弔哭)이었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열성조)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분투),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노력), 짐의 일억 중서(衆庶국민)의 봉공(奉公국가를 받듦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 사용하여무고한 백성들을 거듭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참상)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어린 백성을 보전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직무)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생계)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너희 신민의 적성(赤誠정성과 노력)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이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일본)의 불멸을 믿고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그러나 히로히토는 패전이라는 말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물론 항복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잔혹한 원자폭탄이 이 전쟁의 종결 이유라고 했다나에게는 책임도 반성도 없고 남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 승복이었다일본인들의 전통인 듯 하다.



신문사 벽보에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고, 한민족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국은 해방의 감격에 흥분했고 환호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곳곳에서 보였던 국민복과 몸빼 차림은 자취를 감췄고, 흰 옷 입은 시민들만이 거리를 메웠다. 사람들은 일장기에 푸른색을 덧칠해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 울며불며 뛰어다녔고, 하루 종일 전차에 매달려 만세를 불러댔다. 35년 동안의 일제 통치는 이렇게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인은 해방 후에도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일장기가 휘날리는 총독부에서 일본군이 미군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9 9일 일본 총독부로부터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았다. 사실상 한국의 해방은 형식적인 해방일 뿐, 힘은 일본으로부터 미국으로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일본은 절름발이 경제만을 이 땅에 남겨둔 채 이곳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닥친 해방은 곧 분단의 시작이었다.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돼 서울 시민들이 남산 국기게양대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는 장면



1945 9 9, 조선총독부 광장에서 내려지는 일장기

1945 9 9,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1945 9 9, 미군의 서울 입성

무장해제 당하고 있는 일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