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산풀내음 2017. 7. 9. 06:12

1974 8 15,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1974 8 15일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청중석 뒤쪽에서 뛰어나와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으나 총탄이 빗나가 박대통령 대신 육영수 여사의 머리에 명중 절명했고, 무대 왼편에서 급히 장막을 걷고 들어온 경호원 조모씨의 지향사격 실패로 객석에 앉아 있던 여고생 장봉화가 목에 맞고 사망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YunIG0_qDQ&t=18s

 

 

 

 

 

 

 

문세광은 이날 오전 8시쯤 조선호텔을 나와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검문을 수월히 피하기 위해 미리 포드 20M 검은색 승용차를 빌려놓았다. 극장 입구를 무사히 통과한 문세광은 식장 입구에서 한 차례 검문을 받았지만 일본어를 사용하며 귀빈 행세를 해 식장에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기념식이 시작되고 얼마 뒤. 왼쪽 열 맨 뒷좌석(B 214)에 앉아 있던 문세광은 준비해간 38구경 스미스 앤드 웨슨 리볼버 권총을 꺼내 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첫 번째 총탄은 자신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직후 문세광은 다리를 끌며 통로를 따라 곧장 연단으로 접근했다. "" 두 번째 총알이 박 대통령이 서 있던 연단 왼쪽에 박혔다. 박 대통령은 즉각 자세를 낮춰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겼다. 세 번째는 불발탄.

 

그리고 네 번째 총알이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 여사의 머리 오른쪽에 명중했다. 한 참석자가 문세광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지만 문세광은 비틀거리며 또 한발을 발사했다. 이 총탄은 연단 뒤 태극기에 박혔다. 불과 5~6초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때야 좌석 앞쪽에 앉아 있던 경찰관들이 문세광의 머리를 권총 손잡이로 내려친 뒤 이중삼중으로 덮쳤다.

 

육 여사는 곧장 앰뷸런스에 실려 인근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돼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오후 7시 결국 숨을 거뒀다. 문세광은 재판에 회부돼 1~3심에서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사건 발생 127일 만인 그 해 12 2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당시 현장에서는 총 7발 발사되었다. 문세광이 5, 경호원이 2발이다. 먼저 문세광의 5발을 살펴보면 허벅지, 연단, 불발, ?, 연단 뒤 태극기이다. 여기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측의 주장은 나머지 한 발이 육영수 여사가 아니라 천장이라는 것이다. 경호원의 두발 중 한 발은 오발로 합창단원석에 앉아 있던 여고생을 맞혔고 나머지 한 발은 미궁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2005 1 28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 취재팀의 요청에 따라 당시 녹화된 비디오와 총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사용, 총소리를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 배명진 교수팀이 분석한 결과 경축식장에서 숨진 육영수 여사는 문세광의 총이 아닌 경호원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분석결과를 제시했다.

 

이 같은 분석결과는 1974년 저격사건 발생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으로 재직하다가 수사요원으로 현장검증에 참여했던 이건우가 1989년 월간 다리지와의 인터뷰에서 "육 여사는 절대로 문세광 총탄에 죽지 않았으며 이 사건이 숱하게 은폐되고 조작됐다"고 주장했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당시 이 계장은 "탄흔에 기초할 때 문세광이 쏜 1탄은 오발, 2탄은 연단, 3탄은 태극기, 4탄은 천장에 맞았다" "육 여사를 숨지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나 지금은 밝힐 수 없다"고 주장했었다. 이 계장은 그러나 '숨지게 한 사람'이 누군지는 밝히지 않고 1999 10월 타계했다. 이 계장은 하지만 인터뷰에서 "현장검증도 하기 전에 이미 청와대 경호실에서 탄두를 수거해 갔다"고 밝혀, 육 여사 피격과 청와대 경호실이 연관이 있음을 시사했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이 문세광 쪽으로 달려가며 리볼버 권총 해머를 코킹하면서 권총을 뽑았고 연단 앞에서 지향사격자세를 취할 때 권총이 손에서 미끄러진다. 미끄러진 권총이 박실장 손위에서 놀다가 떨어졌고 권총이 박실장의 왼쪽 무릎을 지날 때 총구는 뒤쪽 45도 방향으로 해머가 풀리며 격발된다.

 

꺼낼 때부터 손에서 총이 헛돌았고 박실장이 권총을 다시 잡으려 할 때 손가락에 해머가 풀려 발사된 총알이 총구 방향 쪽에 있던 육영수의 우측 이마를 맞고 두개골 내부 정수리에서 한번 튀기고 좌측 뒤통수 쪽으로 나오는 게 화면에 잡혀있다. 박실장은 정말 재수 좋게 무릎에 맞을 수 있었던 총알을 피했고 그걸 육영수 여사가 맞았던 것이다.

 

당시 수사 당국 주변에서는 한동안 '3의 저격수'가 있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돌기도 했고, 조총련 등에서는 '음모설'을 유포하기도 했다. 문세광이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장에 비표도 없이 검문을 무사 통과한 점, 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권총을 숨겨왔다면서도 전혀 적발되지 않은 점, 일본인 명의의 위조 여권으로 재일동포 비자를 받아 입국했다는 점 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됐었다.

 

국민장 영결식은 74 8 19일 오전 10시 중앙청(현재 경복궁)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당일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 됐다.

 

 

 

 

차마 보내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는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陸英修, 1925 11월 29 ~ 1974 8월 15) 여사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대지주였던 육종관과 이경령의 1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50 소개로 당시 육군 소령이던 박정희를 만났으며 6·25전쟁 중인 1950 12 박정희와 결혼했다. 당시 박정희는 첫 부인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재혼하였다. 아버지 육종관은 이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는 가출하여 박정희의 임지였던 대구에서 하숙을 했다.

 

영부인이 된 후 육영수 여사의 주된 관심은 민원 처리였다. 6년 동안 영부인실 비서관으로 근무한 정재훈씨는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거리의 여론을 수집하고, 하루 수십통의 민원은 일일이 처리지침을 남겼으며, 특히 억울한 민원현장에는 비서들이 늘 발로 달려가도록 했다 고 전한다.

 

그리고 박정희에게는 가장 무서운 야당 역할도 했다. 남편 박정희 대통령이 1963군정 5년 연장을 미국 대사에게 선언하자 이동원 대사를 불러 남편이 군정 연장을 취소할 것을 설득하도록 도움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육영수 여사는 자신에 생활에는 철저하게 검소하면서 항상 사회적 약자를 위한 봉사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전 부인의 소생인 박재옥을 키워 주기도 했다.

 

 

 

 

1965 2 25, 대구보육원을 방문하신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는 쉬지 않고 소외계층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었고 그들 앞에서 항상 자신을 낮추며 살았다.

 

 

박정희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