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5일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 의문사

산풀내음 2017. 7. 9. 06:18

1989 8 15,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 의문사

 

이내창이 죽은 1989년에는 시대의 격랑이 한반도를 거세게 때렸다. 문익환 목사 평양 방문,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 임수경 북한 방문으로 한반도 전체가 들썩일 때 이내창은 중앙대 안성캠퍼스의 총학생회장이 되어 시위 대열의 선봉에 섰다. 그 해 4 3일에 안기부 등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5 28일에 전교조가 결성되었고 7 9일에 전교조 합법성 쟁취대회가 열렸다.

 

"아직도 학우들을 다 만나지 못했어요. 2학기에는 침묵하는 학우들을 다시 세 번씩 만나겠어요"

 

광복절 휴일을 하루 앞둔 1989 814일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당시 27, 조소과 4)은 학생회 편집부장에게 유언이 되어버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기타를 치며 친구들과 여흥을 즐기는 이내창(왼쪽)의 생전 모습. 그는 임수경과 전대협 산하 같은 지역 조직에 속해 있었다.

 

다음날 오후 630분경 이내창은 전라남도 여천군 삼산면 덕촌리 거문도 앞바다에 한 구의 변사체로 떠올랐다. 15일 열릴 예정이던 대규모 집회와 2학기 사업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더더구나 16일 총장과의 면담약속이 잡힌 총학생회장이 연고도 없고 생전 가보지도 않은 섬에서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한 것이다. 유족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그의 사망 이유와 죽기 직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의혹이 분분했지만, 그 해 1124일 경찰은 이씨의 사인을 '실족에 의한 단순익사'로 발표하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시켰다. 사인규명을 위한 범중앙인비상대책위측은 "이내창 씨가 한때 1989년 방북한 임수경 양의 방북 파트너로 선정되었다는 소문과 관련, 공안당국의 예의 주시를 받고 있던 상태였다" '공권력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제기해왔다.

 

경찰이 이내창씨의 실족익사 지점으로 추정한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500m 앞 바위 지대. 경찰은 발을 헛디뎌 아래 바위에 부딪친 뒤 바닷물에 휩쓸려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시신엔 수상한 흔적이 많았다.


이내창 장례식 때 전경과의 대치


 

그러나 조선대생 이철규 사건과 함께 6공화국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꼽혀온 이내창 사건에 대한 새로운 의혹들이 13년이 지난 2002년에 강력히 제기되었다. 이내창 사건을 조사해온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양승규, 이하 의문사위원회) "사건 당일 현장 부근에서 야영 중이던 '서울시경 형사 2'이 이씨가 죽은 다음날 거문도를 빠져나갔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의문사위원회는 "이씨가 승선한 여수발 거문도행 페리 선박에도 이씨를 감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페리 탑승객), "거문도에 내린 이씨가 무엇인가에 쫓기는 표정이었다"(마을주민)는 진술을 확보했고, 당시 거문도에 체류한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여직원(현재 퇴직)의 알리바이와 이씨의 익사 가능성에도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전체적으로 종합해 보면, 1989 8 14, 신원 미상의 두 남녀가 학교를 찾아와 총학생회장의 소재를 물었다. 내리 중앙슈퍼 앞에서 이 두 사람과 이내창이 30여 분 간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8시 이내창은 두 남녀와 함께 여수항에서 거문도행 신영훼리호를 탔다. 이내창은 매우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고 내내 누워있었으며, 누군가가 그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12 50분경 배에서 내린 후 선착장을 빠져 나와 마을 초입의 첫 번째 골목에 위치한 민박집에 들어갔고, 방을 물어 보더니 그냥 급히 뒷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내창은 여자(안기부 여직원)와 다방에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둘이 대화를 나눌 때 밖에는 남자 한 명이 감시하고 있었다. 주로 여자만 이야기 하였고 이내창은 고개를 숙인 채 듣기만 했다. 여자는 계산을 하고 먼저 나가 밖에서 기다리던 남자와 함께 이내창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이내창과 함께 세 명이 여색선 터미널 방향으로 이동했다. 다방을 나온 이내창과 남녀 2명은 덕촌리행 나룻배(덕성호)에 승선했다. 당시 덕성호 선장은 3명이 동행인으로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내창과 남녀 2명이 유림해수욕장으로 걸어간 15일 오후 330분부터 이씨 시체가 발견된 630분까지 3시간 동안의 행적은 그 동안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다. 다만 당시에 유림해수욕장에 있었던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오후 4시경 인근에서 이내창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목격했고 6시경에는 암석지대에서 2명의 남녀를 목격했다.

 

그날 저녁 6 30,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인근 바닷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상의, 안경, 시계가 없었고, 하의, 양말, 신발은 그대로 착용한 상태였다.

 

검찰과 학교측에서 공동으로 사체를 검안했고 여수 전남병원에서 검찰과 대책위가 공동으로 부검을 실시했다. 당시 의대 교수였던 장임원 의사는 사건현장에 내려가 목격자 인터뷰를 하고 부검에 참여했는데 외상에 의해 실신상태에 이른 다음 익사했다고 했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이내창이 왜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곳에 갔는지, 동행한 두 남녀가 그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내창의 시신은 그 해 10 6일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되었고, 검찰은 실족익사로 수사를 종결하였다.

 

이내창은 1962년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5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서울 청량리와 창신동 일대 셋방을 전전하며 전구 공장, 포목점, 쌀가게 등을 했다고 한다. 사업마다 실패하던 아버지가 한국전력의 전차 차장 자리를 얻고서 신당동 언덕바지에 비로소 집을 마련하였다. 평범한 초, , 고교 시절을 보내다가 중동고 3학년 때 광주항쟁을 간접적으로 겪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후 사회봉사활동 동아리 정우회에 가입해 광주 탄압 규탄대회를 갖고자 유인물을 작성하는 일에 협력한다. 사전에 발각되어 일곱 명 친구가 구속되자 이내창은 예비고사 전날까지 사식을 넣어주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지냈다고 한다.

 

입시에 낙방을 했고 재수하여 인천대 미술학과에 입학했지만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갔다. 제대 후 다시 입시를 치러 중앙대 안성에 입학하였다. 중앙대 안성 총학생회장 시절, 혈서를 쓰기도 하고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지만 늘 모범을 보이고 학업에 성실히 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