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남북통일. 8•15선언 발표

산풀내음 2017. 7. 9. 06:07

1970 8 15,

박정희 대통령, 남북통일. 8·15선언 발표

 

박정희 대통령이 1970 8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제25주년 광복절기념 경축사에서 "북한은 무장공비를 남파해 폭력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적화 통일하려는 야욕을 버리고 이를 실천하면 남북한에 가로 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1970 8.15선언 중인 박정희 대통령

 

세계적 긴장 완화 추세와 `닉슨 독트린`에 따른 미국에 대한 정책 변화와 일반 대중들의 장기 집권에 대한 반발 등 국내 정세의 불안이 8.15 선언의 배경이 됐지만, 1,2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가진 박 대통령은 10억불의 수출을 목전에 두고 북한을 수년 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역시 선언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였다. 필리핀보다 방글라데시보다 에티오피아보다도 못사는 1인당 GDP 100불도 안 되는 나라였다. 6.25 이후 한국을 방문했던 맥아더는 폐허가 된 국토를 보고한국이 회복되는 데는 앞으로 100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당시 그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70년 당시만 해도 남한은 북한에 비해 경제력이 뒤져 있었다. 북한은 금, 은을 비롯하여 철광석 등 부존자원이 남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했다. 수풍댐을 비롯하여 장전강, 부전강 댐 등 압록강 수계의 발전용량이 전 국토의 전기생산량의 80%에 달했다.

 

이 선언을 계기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했다. 19727.4남북공동성명이 나왔으며 1973년 유엔 동시가입을 제의한 6.23선언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1973 8 8일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을 빌미로 한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의 8.28성명으로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 해를 기점으로 남북한의 경제가 역전되자 북한은 1974년 조총련의 문세광을 통해 또 다시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자 8.15사건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육영수 여사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