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충남

태화산 마곡사와 백범 김구

산풀내음 2018. 9. 10. 21:22


지난 토요일, 대표적인 관음성지인 공주 태화산 마곡사를 다녀왔다.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마곡사 봄의 정취가 수려하다고 한다. 만물이 약동하는 봄이면 마곡사는 다양한 나무들과 꽃으로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나는 가을의 길목에서 공주에 있는 마곡사를 찾았다. 공주는 두번째 방문이다. 대학시절 친구의 부탁으로 친구의 여자친구와 함께 와본 이후 30년만의 방문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우정도 덧없이 사라진 지금의 공주는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또한 인근 세종시의 개발 덕분인지 물리적인 모습도 30년 전과는 많이 다른 듯 하였다.

마음속 한켠에 자기잡고 있는 아쉬움 때문인지 마곡사 방문의 첫인상은 그닥이었다. 또한 마곡사 주차장에서 좌측으로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이나 우측의 계곡을 향하는 길이나 모두 길따라 널어선 상가들의 모습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자 하는 방문자의 눈에는 아쉬움을 더했다. 하지만 매표소를 지나면서 그런 아쉬움은 새로운 기대감으로 변하게 된다. 

매표소를 지나면 마곡사로 가는 길은 두갈레로 나뉘어진다. 산길을 따라 풀내음을 맡으면 가는 흙길과 계곡을 따라 잘 꾸며진 나무데크길이다. 갈 때는 흙길로 돌아올 때는 나무데크길로 걸었는데 두 길 모두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기에 감히 비교할 수가 없었다. 


숲길에서 본 마곡사의 모습

개울을 따라 잘 정비된 데크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 해탈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해탈문의 왼편에는 마곡사에 가장 오래된 건물로 1650년에 중수되어 ​보물 800호로 지정된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은 마곡사에서 가장 영험이 큰 전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하는 일곱 분의 부처님을 그 중심에 그리고 그 주위에 1000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유명한 온천과 약수를 찾아다닌 세조(재위 1456~1468)가 이곳에 들렀다. 매봉 아래 작은 봉우리에 올라가 보고는 끝없이 감탄하면서 “만세 동안 없어지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고 말했다. ‘영산전(靈山殿)’이라는 편액을 특별히 써 주고,잡역의 부담을 면하도록 해주었다. 영산전 현판은 지금도 전하는데, 현판엔 ‘세조어필’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금강역사상과 보현,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해탈문 뒤로 천왕문이 보인다

영산전내 모셔져 있는 칠불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 해탈교에 서면 마곡사의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면에 마곡사 5층석탑과 그 뒤로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있다. 오른쪽에는 범종각과 관음전이, 왼쪽에는 명부전, 응진전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이 있다. 


마곡사는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율사가 선덕여왕의 후원으로 통도사, 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640년이면 백제 무왕(?-641) 시절이며 사비와 웅진을 중심으로 백제의 중흥을 이끈 왕인데 이 지역에 있는 마곡사가 신라의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인듯 ... 또 한편으로는 '신라 무선(無禪)스님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마곡사를 창건하고, 스승인 마곡보철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로 정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창건 이후 마곡사는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의 중수가 있었다. 또 고려시대인 1199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왕명에 의해 마곡사를 중수했다고 하며, 12세기 말부터 15세기 후반 사이에 건립되었던 30여 채에 이르는 건물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어 마곡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마곡사는 불화를 그리는 화승(畵僧) 계보로도 널리 이름을 알렸던 화소사찰(畵所寺刹)로도 유명하다. 화승(畵僧)들을 전문적으로 기르고 배출했던 마곡사는 수많은 화승들을 대대로 배출해‘남방화소(南方畵所)’라 불릴 정도였다. 공주 계룡산 권역의 화승들은 계룡산 화파라고도 불렀는데 계룡사 화파의 중심이 바로 마곡사였다. 

- 불교신문,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③ 공주 마곡사"에서 인용 -

마곡사에는 주불전이 두곳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광보전과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보전이 그것이다. 1788년에 중창되어 보물 제802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광보전에는 '삿자리를 짠 앉은뱅이' 전설이 담겨져 있다. 조선 후기에 한 앉은뱅이가 자신의 다리를 고치기 위해 부처님께 백일 기도를 드리려고 찾아왔다. 그는 백일 기도를 드리는 동안 법당 마루의 삿자리를 짜겠다고 자청했다. 100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앉고 참회의 기도와 함께 30평의 자리를 짜고 나자 그의 정성에 부처님이 감복했는지 그는 스스로 일어나 걸어나갔다는 것이다.

내부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은 정면이 아니라 건물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는 점도 매우 특이하였다. 게다가 후불탱화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영산회상도인데 영산전이 아니라 이곳에 모셔져 있다.

보물 제799호인 오층석탑은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라마교 탑과 비슷한 형식으로 세워진 것으로 상륜부에 있는 금동 때문에 금탑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대광보전 뒤에는 대광보전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대웅보전이 있다. 2층으로 된 대웅보전은 1785년에서 1788년에 걸쳐 중수되었으며 현재 보물 제 801로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불로 양옆에는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대적광전에서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대웅보전이 나온다

마곡사 마당 한 쪽에는 ‘백범당(白凡堂)’이 자리하고 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마곡사에서 복원한 건물이다. 백범당 옆으로는 해방 이후 1946년 선생이 동지들과 함께 마곡사를 찾아 기념식수한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백범당 옆에는 부처님 제자 16 나한님을 모셔 놓은 응진전이 있다


백범이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하여 황해도에서 일본군 중좌를 살해해 인천교도소에 옥살이를 하다가 교도소를 탈옥해 사찰에 은신했다. 여주 신륵사와 하동 쌍계사 칠불암 등을 전전하다가 공주 갑사와 동학사를 거쳐 마곡사에 도착했다. 이때 머문 곳이 마곡사 백련암이다. 김구 선생이 마곡사로 출가해 스님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알려졌지만 1년여에 걸친 수행자로서의 모습은 온전히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해방 직후 미군정 아래에서 이승만이 미국과 기독교 세력의 지지 속에서 권력을 장악하면서 민족진영 및 불교계와 가까웠던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소외시키는 과정에서 더욱 묻혀졌다”고 보고 있다.

김구 선생은 마곡사에서 삭발염의하고 부처님 제자가 되었으니, 법명은 원종(圓宗)이었다. '백범일지' 초간본에는 백범의 ‘득도식(출가의식)’ 상황이 기록돼 있다. 사형사제 사이인 호덕삼 스님을 따라간 냇가에서 “머리가 섬뜩하며 내 상투가 모래위에 뚝 떨어진다. 이미 결심한 일이건만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범 선생께서 삭발하신 곳

현재 마곡사에는 백범 명상길이 세가지 코스로 조성되어 있다. 제1코스는 백범 선생의 기념관과 삭발터를 지나 군왕대에 오르는 2km가 조금 넘는 거리로 호젓한 산속의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제2코스는 트레킹코스로 적당하며 천연송림욕장과 백련암을 거쳐 활인봉과 생골마을을 돌아보는 5km의 길이며, 제3코스는 앞의 두 코스와 등산을 포함한 10km의 풀코스다. 나는 마곡사에서 시작하여 김구 선생께서 삭발염의하신 삭발바위를 지나 나발봉, 활인봉, 백련암을 거쳐 다시 마곡사로 오는 8.6km의 코스를 선택하였다. 마애불 기도처로도 유명한 백년암에서의 기도시간을 제외하면 2시간 30분에서 3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코스였다.


백년암은 김구 선생께서 머무신 곳으로도 유명하지만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주시는 마애불 기도처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신다는 백련암 마애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