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충남

계룡산 사찰 순례, 동학사

산풀내음 2019. 11. 25. 21:55


11월을 한 주 남겨두고 계룡산을 찾았다. 공주를 중심으로 논산, 계룡, 대전에 걸쳐있는 계룡산(鷄龍山)은 이어지는 산봉우리들의 능선이 마치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진 산이다.

또한 계룡산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인연이 각별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이성계는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려고 했고, 이곳에 답사를 왔을 때 동행했던 무학대사가 신도안의 좌우 산세를 둘러보고 ‘이 산은 한편으로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니 계룡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한 데서 계룡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고로 이성계는 신도안에 1년여 동안 궁궐 조성 공사를 하였고, 지금도 궁궐공사에 쓰였던 주춧돌 115개가 남아 있어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계룡산에는 사찰 및 기도처가 많은 곳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계룡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대표적인 사찰을 두어 이상적인 불국토를 기원했다고 하는데, 동 동학사, 서 갑사, 남 신원사 그리고 지금은 폐찰된 북 구룡사가 그 곳이다. 이번 계룡산 방문은 이 세 곳, 동학사, 신원사, 갑사를 차례로 순례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번 사찰 순례에서는 왠지 관세음보살님께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방문하고자 하는 세곳이 관음기도로 유명한 곳인지는 상관없이 ... 그런데 자료를 조사하면서 문제가 발견되었다. 신원사와 갑사에는 관음전이 별도로 있었지만, 동학사에는 없었다. 가능하면 독립된 공간에서 조용히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올리고 싶었기에 동학사에 관음전이 없다는 사실은 나에겐 다소 당황스러웠다.


동학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에도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세분이 모셔져 있었다. 동학사의 산내암자에 관음암이 있었는데 이곳에도 관세음보살님만을 따로 모셔진 전각은 없는 듯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계룡산 산행코스를 동학사에서 시작하여 관음봉을 제일 먼저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관세음보살께서 상주하고 계시다는 생각과 함께 ....

계룡산은 세번째 방문이다. 첫번째는 동학사를 들머리로 해서 삼불봉, 관음봉을 거쳐 원점회귀하였고, 두번째는 동학사에서 남매탑을 거쳐 갑사로 나가는 코스를 택했다. 이번에는 여러 코스를 고민하다가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지난 번의 역순으로 하는 코스를 택했다. 동학사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하여 동학사, 은선폭포, 관음봉, 삼불봉, 상원암(남매탑)을 거쳐 다시 동학사와 동학사탐방지원센터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를 택했다. 자료에 따르면 보통 5시간 정도의 코스라고 되어 있지만, 나와 아내의 경우는 동학사와 상원암에서의 기도시간을 제외하면 5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계룡산 탐방안내도


동학사를 품은 계룡산은 이미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이른 아침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맑은 하늘에 시작의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고, 관음봉에서 바라본 풍광은 나의 시름을 날려보내기에 충분했다. 


관음봉에서 가볍게 아침겸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자연성릉(관음봉에서 삼불봉에 이르는 2.1㎞ 암릉구간)을 따라 삼불봉으로 가는 도중에 왠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졌다. 왼쪽 팔목에 차고 있었던 108염주가 사라진 것이었다. 아차 싶었다.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 부처님 전에서 돌렸던 염주, 그 염주에 묻어 있는 나의 번뇌와 업보를 관음봉에 상주하시는 관세음보살님께 벗어 두고 온다고 ...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 졌다. 

자연성릉


삼불봉을 지나 남매탑으로 더 잘 알려진 상원암에 도착하였다. 계룡산을 올 때마다 남매탑에 왔었지만 바로 아래에 있는 상원암에 내려간 적은 없었다. 아내가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다고 하여 처음으로 암자로 발길을 돌렸고, 암자의 전각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다.


상원암 전각 벽면에 있는 부처님 말씀


자연스럽게 전각 앞으로 향했고, 전각 안을 슬쩍 들여다 보았다. 관세음보살께서 계시는 것이었다. 동학사에서 그렇게 찾았던 관음전이 이곳 상원암에 있는 것이었다. 그때의 기쁜 마음은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상원암에 모셔진 관세음보살


사실 비구니 사찰인 동학사의 이야기는 남매탑 전설에 전해지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남매탑은 동학사와 갑사의 중간지점인 삼불봉 밑의 옛 청량사 터에 탑 2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5층(보물 제1284호), 다른 하나는 7층(보물 제1285호)으로 청량사지쌍탑이라고도 불린다.

신라 선덕여왕 원년에 당의 승려 상원대사가 이곳에 움막을 치고 수도를 하고 있었다. 억수 같은 비가 오고 천둥이 치던 어느 날 밤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움막에 나타나 입을 벌렸다. 대사가 호랑이의 목안을 들여다 보니 인골이 걸려있다. 인골을 뽑아주자 호랑이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사라진 호랑이는 며칠이 지나 스님의 은공을 갚기 위해 아리따운 처녀를 물어왔다. 대사는 정성을 다해 물려와 기절한 처녀를 돌본다. 정신을 차린 처녀는 경상북도 상주사람으로 혼인을 치른 날 밤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스님에게 말하였다. 그때는 산에 눈이 쌓이고 날씨도 추운 겨울이라서 돌려보낼 수 없어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오자 스님은 처녀를 집으로 돌여보냈다.

하지만 그 겨울 내내 대사를 지켜본 김 처녀는 스님에게 반한 지 오래다. 대사의 불심과 청정한 도덕, 온화하고 준수한 풍모에 연모의 정이 생긴 처녀는 부부의 예를 맺을 것을 청한다. 하지만 대사는 고사한다. 수행정진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의남매가 되기로 한다. 둘은 함께 계룡산으로 돌아와 평생토록 남매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에 힘쓰다가 같은 날 함께 열반에 든다. 

이렇게 의남매의 연을 맺어 수행자로서 열심히 정진한 두 분을 기리기 위해 스님의 제자인 회의화상이 화장 후 사리를 수습하여 성덕왕 23년(724년)에 탑을 건립하게 되었는데 이 탑을 이름하여 남매탑 또는 오누이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을 청량사(淸凉寺)라 불렀다. 문수보살이 강림한 곳이라 해 붙인 이름이었다. 동학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태조 3년(920년)에 왕명을 받아 도선국사가 중창하였다. 태조 19년(936년)에 신라가 망하자 신라의 유신으로서 고려 태조 때 대승관 벼슬을 한 유차달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동계사(東鷄士)를 짓고 절을 확장한 뒤 절 이름도 지금의 동학사로 바뀌었다.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라고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번창했던 동학사는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서서히 중건되기 시작한다. 1956년에는 경봉용국(鏡峰容國)스님을 모시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초의 현대식 비구니 전문 강원을 개설했다. 한국비구니불교사에 새로운 획은 긋는 순간이었다. 1958년에 문을 연 운문사 승가대학보다 2년 앞선 것이다.






동학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동학사 강원


동학사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사찰에서 극히 보기 어려운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유·불교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홍살문은 동학사를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학사의 일주문보다 먼저 있다.


또한 동학사와 담을 경계로 동학사 바로 옆에는 유신(遺臣)의 혼을 기리는 동계사(東鷄祠), 삼은각(三隱閣)과 사육신(死六臣)의 혼을 기리는 숙모전(肅慕殿)이 있다. 동계사는 절이 아닌 사당이며, 신라 유신(遺臣) 박제상의 충렬을 기리고자 고려 태조 때 세워졌다. 내가 방문한 시간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으로는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삼은각은 조선 태조 때 건립됐으며, 고려 유신(遺臣) 포은 정몽주·목은 이색·야은 길재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숙모전은 조선 후기 세조 때 건립됐다. 특히 숙모전은 처음에 ‘초혼각(招魂閣)’이라 불렀다. 단종의 왕위를 뺏은 세조가 자신을 역모하는 사육신을 참수시켰는데, 김시습이 이 시신들을 노량진 언덕에 매장한 뒤, 동학사에서 초혼각을 지어 충절을 기렸다.

후에 세조가 우연히 동학사를 방문하다 이 사실을 알았고, 자기로 인해 죽은 280명의 이름을 초혼각에 모시게 했다. 초혼각은 영조 때 소실(燒失)됐고, 고종 6년(1896)에 중건, 고종 41년에 숙모전으로 개칭됐다.

현재는 89위(位)가 봉안돼 있고, 매년 봄·가을 추모재를 올릴 때만 개방한다. 이처럼 동학사에는 역대 왕들이 세웠거나 충신의 혼을 기리는 건물들이 붙어 있어, 사찰 입구 길목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출처 : 천지일보, "[종교문화재 탐방-계룡산 동학사] “사찰 앞에 웬 홍살문” 독특한 ‘동학사’ 매력에 빠지다")

동학사 산내암자로는 관음암, 길상암, 문수암, 미타암, 상원암 등이 있다. 동학사 일주문을 지나 올라가면 관음음, 길상암, 미타암이 차례로 나오고, 관음암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문수암이 나온다. 상원암은 동학사에서 갑사로 가는 길을 따라 1시간 30분 가량 올라가면 남매탑과 함께 있다. 대부분의 암자들이 본사인 동학사 인근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도 동학사 만의 또다른 특징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