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충남

계룡산 사찰 순례, 갑사

산풀내음 2019. 11. 27. 20:07


'갑사로 가는 길'

이상보의 수필, 동학사에서 갑사로 가는 길을 이야기한 '갑사로 가는 길'.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 교과사에서 이 글을 접한 이후 이 길과 함께 갑사에 대한 뭔지 모를 향수를 가지게 되었다.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지 오래되었지만, 처음 가 본 것은 불과 2년 전이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사찰이었지만, 단체 산행 중에 들린 곳이라 사찰을 찬찬이 둘러보지 못해 항상 아쉬움이 있었던 곳이었다.

계룡산의 대표적인 사찰 중에서 특히 가을 풍경으로 유명한 갑사를 가을의 마지막 자락에 찾았다. 신원사의 따스한 느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찾은 갑사는 지난 방문 때의 느낌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가을을 보낼 채비가 한창이었지만, 아직 '추갑사'의 명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너무나도 좋은 하루였다.


세상에서 으뜸가는 사찰이란 의미의 갑사(甲寺)는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년)에 아도화상이 계룡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백제 위덕왕 3년(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신라의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 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종의 도량이 됨으로써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고 한다.

창건과 관련하여서는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고 400년 지나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큰 서원을 세우고 사리보탑에 있던 부처님의 사리를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왕들로 하여금 마흔여덟 방향에 봉안케 하였다. 이때 북쪽을 관장하던 다문천왕(비사문천왕)이 동방 남섬부주 가운데서도 명산인 계룡산의 자연 석벽에 봉안한 것이 지금의 천진보탑(天眞寶塔)이다.

그 후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도리사(挑李寺)를 창건(創建)하시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찿아가 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이로써 탑 아래에 배대(拜臺)에서 예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년)이다.

신흥암

천지보탑은 갑사에서 동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신흥암 대웅전 뒤편 산에 우뚝 서 있다.

신흥암 산신각 뒷편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가면 천진보탑에 갈 수 있다.


임진왜란 때는 영규대사를 중심으로 왜군에 항거하는 승병궐기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영규대사는 갑사에서 출가하여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어 항상 이절에서 주석하고 있었다.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해 여름에 왜구가 청주지방까지 이르러 청주가 점거 당하자 이에 영규대사는 승병장이 돼 승병 800여 명을 규합해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인 청주성 수복을 이끌었다.


“내 목숨 하나 내놓으면 부처님과 신장님들이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중생을 구할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나와 함께 중생을 구하러 가자.”

이후 영규대사는 의병장 조헌(1544~1592)과 함께 1592년 8월 금산전투에서 일본군의 호남 침공을 저지하던 중 큰 상처를 입고 갑사 인근 월암리에서 숨을 거뒀다. 왜란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후인 영조 14년(1738년)에야 갑사에 표충원을 세우고 서산, 사명대사와 함께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선조 30년(1579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갑사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영규대사를 키운 갑사에 보복을 한 셈이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갑사는 선조 37년(1604년) 인호, 경순, 성안, 보윤 스님이 주축이 되어 갑사의 재건의 추진하였다. 하지만 전쟁 직후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부처님의 가피로 ‘힘센 소’가 나타난다.

왜란이 끝난 어느 날 불사 현장에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생김새가 늠름했고 힘 또한 엄청났다. 소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척척해냈다. 홀연 사라지더니 어딘가에서 목재와 기와를 실어오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예사 소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소를 보며 힘을 냈다. 남녀노소 너나없이 불사에 참여했다. 그렇게 무사히 불사를 마쳤고 사람들은 소를 칭송했다.

그런데 법당에 부처님을 모신 직후 갑자기 소가 죽어버렸다. 사람들은 필경 부처의 현신일 것이라며 죽음 앞에 경배했다. 그리고 그 공을 새겨 탑을 세웠다.

(출처 : 법보신문, "30. 충남 계룡산 갑사")

이후 갑사는 효종 5년(1654)에 가람이 전면적으로 개축 중수되었으며 고종 12년(1875)에 다시 중수되었다고 전한다.



(출처 : 갑사 홈페이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05호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협시불(脇侍佛)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4대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대웅전 소조삼세불상과 소조협시보살상은 17세기에 조성된 대표적 대형 소조불상(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전통 불상)으로 알려져 왔었는데, 2016년 관음보살상은 복장 유물을 확인한 결과 광해군 9년(1617) 행사(幸思) 스님이 수화승으로 참여해 조상한 불상임이 확인되었다.

삼성각

관음전

관음전에 모셔져 있는 관세음보살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갑사석조약사여래입상(甲寺石造藥師如來立像)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갑사 중사자암에 있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이안하였다고 한다.

갑사 관음전 옆에 있는 문을 나가서 왼쪽으로 가면 천진보탑이 있는 신원암으로 가는 길이고, 앞으로 곧장 가면 자연 동굴 안에 모셔져 있는 갑사석조약사여래불을 뵐 수 있다. 손모양을 살펴보면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갑사 공우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