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충남

은행나무와 한석규 광고로 더 잘 알려진 보석사

산풀내음 2018. 10. 7. 22:17

금산에는 인삼축체(10월 5일 - 14일)가 한창이다. 축제도 보고 인삼도 구입할 겸해서 금산으로 길을 떠났다. 가는 길에 한석규의 CF와 1200년 수령의 은행나무로 유명한 관음기도도량 보석사에 들려 부처님께 인사도 올렸다.


작지만 아름다운 사찰, 보석사. 중앙에 대웅전이 위치해 있고 그 옆에 기허당이 있다. 그리고 멀리 산신각이 보인다.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줄여 이름 지어진 금산에는 작지만 아름다운 사찰 보석사가 진악산(732m)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12년(866년)에 조구대사가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영규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당시 불타 없어진 사찰을 고종 때 명성황후가 중창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로 당시에는 금산군이 전락북도에 속해 있어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거느렸다.

사찰치고는 이름이 독특하다. 당시 절 앞산 기슭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보석사(寶石寺)’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금으로 만들었다는 불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 안에는 대웅전, 기허당, 의선각, 산신각 등의 건물과 부속암자가 있다. 특히 일주문을 지나 2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은 한석규가 등장하는 CF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말과 같이 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사색에 빠지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옆에 1840년도에 세워진 '의병승장비'가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승장으로 전장에 나서 순절한 영규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사적비다. 건립 100여년이 지난 1940년, 일본 순사가 비각을 헐고 훼손해 묻어 놨던 것을 광복 후 다시 세웠다.

보석사 전나무 숲길. 보석사 전나무 숲길은 다른 전나무 숲길과 조금 다르다. 양옆으로 모두 전나무가 쭉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왼편은 은행나무가, 그리고 오른편에는 전나무가 나란히 도열해 있다. 전나무 길 옆에는 작은 내가 조용히 흘러 산사의 멋을 더하고 있고, 은행나무 들의 끝은 최고 어른(?)인 1200년 은행나무가 근엄하게 서 있다.

보석사로 들어가는 입구

대응전에는 사시기도가 한참이었다. 보석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재위 1863∼1907) 때 명성황후가 다시 세웠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규모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고풍스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전내에는 주존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기허당. 영각의 이름을 '騎虛堂(기허당)'이라 한 것은 기허당 영규대사의 법명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보석사 대웅전 앞에 있는 의선각은 의병승장 영규대사가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다. 영규대사는 공주 계룡산의 갑사와 보석사를 내왕하며 도를 닦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중봉의 의병과 합세하여 금산이 왜적을 격퇴하려다가 700 의사와 함께 전사한 분으로 그 용맹과 담력은 출중하여 싸움마다 크게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의선각은 영규대사가 보석사에 계실때 은거하던 곳으로 창녕위 김병주의 글씨로 된 의선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그 길끝 좌측에 1,10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안은 채 위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호)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높이 40m, 둘레 10.4m의 은행나무는 조구대사가 제자 5명과 함께 육바라밀(六波羅密 ;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에 이르기 위한 보살의 여섯 가지 수행. 곧,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을 상징하는 여섯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들이 모두 한 몸이 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 중에 하나이며,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나면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실제 1945년 광복 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많은 이들이 나무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무를 마을을 지키는 신령으로 여기고 각별히 모시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는 수령이 약1,100~1,500살로 추정되는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로 알려져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麻衣太子, 912년? ~ ?)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의태자가 심은 것이 맞다면 조구대사가 그 제자들과 함께 심은 보석사 은행나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된다.





은행나무 이야기


석가모니께선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나무 아래에서 태어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무상정등각을 얻었고, 녹야원 에서 최초의 설법을 폈으며,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의 탄생, 성도, 전법, 열반의 과정에 나무가 함께 한다. 대표적인 예배대상은 보리수 나무이지만, 절집을 상징하는 가장 보편적인 나무는 은행나무라 할 수 있다. 흥주사, 운문사, 범어사, 수종사, 우곡사, 전등사, 고견사 등에는 수령이 500년이 훌쩍 넘고 저마다의 설화를 가지고 있는 은행나무들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23그루 중에 사찰에 있는 것은 네 그루이다. 용평 용문사 은행나무,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 그리고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가 그것이다. 이중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만 수령이 800년 정도이고, 나머지 세 은행나무는 모두 10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나무는 3억 5천만 년 전의 고생대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복되는 빙하기에도 은행나무는 멸종하지 않았고,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고대의 화석에서 발견되는 잎의 형태와도 거의 변함없다. 진화하지 않고 살아남은 까닭에 1목 1과 1속 1종의 식물분류 계통을 유지하고 있다. 진화론의 찰스 다윈은 은행나무에 ‘살아있는 화석(living fossil)​’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은행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대변한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폭심에서도 살아남아 현재도 자라고 있다니 은행나무가 지닌 강력한 생존력과 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현대불교, "가을의 전설, 은행나무 천왕목",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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