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경북

8대 적멸보궁의 마지막 여정, 비슬산 용연사

산풀내음 2018. 12. 9. 08:11

비슬산 자락에 위치한 용연사는 신라 신덕왕 1년(912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했으며, 이 절터는 용(龍)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절 이름을 용연사(龍淵寺)라 불린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6년(1603년)에 휴정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영에 따라 인잠(印岑), 탄옥(坦玉). 경천(敬天) 등이 재건했다. 그러나 효종 1년(1650년)에 난 불로 다시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고, 다음 해에 계환(戒環), 여휘(麗輝) 등이 중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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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8대 적멸보궁 중에 하나인 용연사는 현존하는 당우로 적멸보궁, 극락전, 나한전을 비롯하여 사명당, 보광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보물 제539호인 금강계단과 보물 제 1813호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그리고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인 삼층석탑 등이 있다.

계단(戒壇)이란 부처님사리(佛舍利)를 모시고 수계의식(授戒儀式)을 행하는 곳으로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기도 하며, 부처님이 항상 그 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금강계단의 전면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을 건 전각을 건립하는데, 그곳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금강계단에 불(佛)을 상징하는 부처님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예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진신사라탑의 석조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 금산사 방등계단, 개성 불일사(佛日寺)의 계단, 그리고 이곳 용연사 금강계단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계단(戒壇)이다.

용연사 금강계단에 봉안된 부처님 사리는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5곳(5대 적멸보궁)에 나누어 봉안한 것 중,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통도사의 사리탑이 파괴돼 사리를 도난당했다. 그 후 사명대사에 의해 다시 수습되고, 또 서산대사의 명에 따라 한 개의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또 다른 함은 통도사에 안치토록 했다. 그러나 전란과 사명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에 일시 봉안했으나 현종 14년(1673) 5월 5일 이곳 용연사 금강계단 보궁에 봉안하게 됐다고 한다. 

* 한국의 5대 적멸보궁인 경남 양산 영치산 통도사(通道寺), 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강원도 인제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강원도 정선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에 경북 구미 도리사(桃李寺), 강원도 고성 건봉사(乾鳳寺), 대구 달성 비슬산 용연사(龍淵寺)의 적멸보궁을 더하여 우리나라 8대 적멸보궁이라 이른다.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에 “용연지”라는 못이 있었다. 이 못은 주변마을 사람들의 식수와 농업용수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가뭄이 들어도 주민들은 이 못에서 부족한 물을 얻을 수 있었다. 매월 정월 초에는 제사를 올려 그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평온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던 중 이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치게 되었는데, 그 것은 바로 외적의 침입이었다.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러나 외적을 막아내려니 전방에 나가 외적과 직접 맞서 싸울 주민들이 필요했으나 대부분의 주민들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라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외적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마을이 위험에 처하자 마침내 일곱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발 벗고 나섰다. 이 청년들의 목숨을 건 전투 덕분에 외적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청년들은 모두 전사하여 못의 물을 피로 붉게 물들게 하여 마을 주민들을 비통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청년들이 죽은 지 몇 년이 지나자 그 못의 물이 이유 없이 계속 마르기 시작했고, 결국은 바닥이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못은 마을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물을 공급해 왔기 때문에 그 일은 심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은 일곱 명의 청년들이 한이 남아 이 못을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영령을 기리는 제사를 매년 크게 치러주었다. 그랬더니 그 이후로는 신비롭게도 못의 물이 다시 불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언제부터인가 그 못에서 일곱 마리의 어린용이 살기 시작했고, 특이하게도 이 마을에 가뭄, 홍수, 화재, 기한 등 인간 능력 밖의 재앙이 생겨 힘들 때마다 이 용들이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에게 이 못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천 년이 지나자 용이 승천할 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이 일곱 마리의 용들이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는 일이 발생하여 못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그 싸움 중에 네 마리의 용은 무사히 승천을 했지만 세 마리는 끝내 올라가지 못하고 그 못에 남아 계속 다투게 되었다. 마을의 우환을 관장하던 용들이 승천을 위한 싸움에 몰두하느라 마을을 돌보는 일을 소홀 하게 되어 그해 농사는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고, 마을에는 전염병이 돌아 목숨을 잃는 주민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먼 바다로 나가 재앙으로부터 마을을 구해달라고 용왕님께 제를 올리게 되었다. 용왕은 그의 아들인 이무기를 지상에 내려 보내 세 마리의 남은용을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다.

결국 세 마리의 용은 못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 후 마을 주민들이 죽은 용을 위해 제사를 올려주었다. 이런 용을 위한 제의 풍습은 매년 이루어지면서 전승이 되어 왔고, 주민들은 죽은 용들을 위해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을 용의 못이라는 의미에서 용 용(龍 )자에 못 연(淵)자를 써서 용연사(龍淵寺)라 불렀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지금도 용연사에서는 매년 단오(음.5월5일)경에 용왕제를 성대히 거행하고 있다.


(출처 : 용연사 홈페이지)



차를 주차하고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좌.우로 나뉘게 된다. 좌측은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이며, 우측은 '극락전, 명부전'으로 가는 길이다. 가람의 배치가 마치 금강산 건봉사의 느낌이 들었다. 


먼저,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적멸보궁 입구에 심어진 국화는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직 노란 가을 향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적멸보궁에서 부처님 참배 후 용연사 극락전으로 향했다. 방금 전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용연사로 통하는 극락교가 있고 그 뒷편으로 용연사의 전경이 보인다. 극락교이라는 석교는 167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당시 500명이 넘는 승려와, 2백 수십칸이 넘는 사찰규모를 자랑하던 곳이라고 한다.



천왕문을 지나 극락전의 경내로 오르는 중간에 있는 누각으로 원래 이름은 '보광루'였으며 적멸보궁의 누각을 지으면서 보광루라는 명칭을 넘기고 안양루라고 바꾼것이라고 한다.

안양루를 지나면 바로 극락전이 나타난다. 극락전에 모셔진 석가 삼존불은 조선후기 영조 4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처마 맛배지붕의 다포식 공포를 한 조선 후기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용연사 극락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龍淵寺 三層石塔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의 조각양식이 변화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극락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보물 제1813호)은 본존인 아미타불, 좌협시인 관음보살, 우협시인 대세지보살로 되어 있다. 이 삼존불은 1655년 수화승 도우가 주도하고 다른 조각승들이 도와 만들었다. 도우는 대구 운흥사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경북 칠곡 송림사의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과 석조아미타여래산존좌상을 제작한 인물로서 17세기에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활약한 조각승이다.

후불탱화는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열 살에 죽은 효장세자의 빈궁 조씨를 비롯한 몇몇의 시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조씨는 나이 열셋 되던 1727년에 아홉 살 난 효장세자의 세자빈이 되었다가 이듬해 그를 사별했다. 그러니까 세자의 3년상을 끝내고 그의 천도를 위해 이 영산탱을 시주했던 모양이다. 평범한 여인으로 치자면 아리고 기막힌 사연이겠으나 아무튼 이러한 왕실의 뒷받침으로 그려진 그림이라 그 솜씨도 남달라 청록의 고운 색감, 양 보살의 투명한 두광 표현, 다양한 표정의 섬세한 얼굴 모습 그리고 다채로운 의복 표현 등이 짜임새 있게 자리잡은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


극락전의 벽화들


극락전 옆에 위치한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한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영산회도(靈山會圖)를 모시기 위하여 특별히 지은 전각이다. 영산회(靈山會)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취산이라는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침을 베풀던 모임이다. 이곳에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脇侍)로 봉안한다. 좌우로 16나한상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