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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 정기 내린 대견사

산풀내음 2018. 12. 9. 07:33

자장율사(慈藏律師)께서 당나라 유학 중 청량산(淸凉山)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전해 받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에서 시작한 사찰탐방이 건봉사와 도리사를 거쳐 이제 8대 적멸보궁 탐방의 마지막 남은 용연사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용연사가 위치한 비슬산(琵瑟山)​은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청도군의 경계에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달성군지』에는 수목에 덮여 있는 산이란 뜻의 포산(苞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내고장 전통 가꾸기』(1981년 간행)에 보면 비슬산은 소슬산(所瑟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인도의 범어로 부를 때 일컫는 말이며 중국말로는 포산(苞山)이란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 신라시대에 인도의 스님이 우리나라에 놀러 왔다가 인도식 발음으로 비슬(琵瑟)이라고 해서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가사사적(瑜伽寺寺蹟)』에는 산의 모습이 거문고와 같아서 비슬산(琵瑟山)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설에 비슬산은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비슬산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슬산(琵瑟山)에는 '사왕설'(四王說)'이 회자되고 있다. 비슬산의 '비슬'(琵瑟)의 한자에 임금 '왕'(王) 자가 2개씩 모두 4개로 이뤄져 있다. 게다가 비(琵) 자에는 견줄 '비'(比), 슬(瑟) 자에는 반드시 '필'(必) 자가 임금 왕을 떠받들고 있다. '비'(比)와 '필'(必)은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가 그 4명이라는 의견도 있고, 대구 달성을 기반으로 한 분은 박근혜 한 분이기 때문에 앞으로 3명이 더 나온다는 의견도 있다.

팔공산과 더불어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산인 비슬산에는 팔공산과 마찬가지로 용연사(龍淵寺), 유가사(瑜伽寺), 대견사(大見寺), 소재사(消災寺), 임휴사(臨休寺), 용천사(湧泉寺) 등 많은 고찰(古刹)을 품고 있다. 며칠간을 머물면서 비슬산의 정기를 받아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오늘은 오늘은 이미 언급한 용연사와 삼층석탑과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사된 후 100여년 만인 2014년에 복원된 대견사를 방문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대견사 역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사찰 넘어 보이는 것이 비슬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대견봉이다. 걸어서 10분 정도 가볍게 가면 된다.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대견사(大見寺, 해발 1,035m)는 설악산 봉정암(해발 1,224m), 지리산 법계사(해발 1,450m)와 함께 1,000m 이상에 자리 잡은 사찰 중에 한 곳이다. 세곳 모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적멸보궁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봉정암과 법계사는 각각 설악산과 지리산 자락에 위치해 있는 반면 대견사는 비슬산(琵瑟山)의 제2봉(최고봉은 1,084m의 천왕봉(天王峰))인 대견봉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점이 두 사찰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창건 당시 비슬산 정상에서 일본의 대마도 방향으로 사찰을 건립하여 왜구의 기를 억압하려고 했던 대의가 품어져 있는 것이다.

대견사는 신라 헌덕왕 2년(810년)에 당시 왕실 사찰로 보당암(寶幢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덕왕이 비슬산 정상부에 대견사를 창건함으로써 당시의 지방 세력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함과 동시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의 대마도 방면으로 위치함으로써 왜구의 세력을 억누르고자 함이었다.

대견사의 창건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중국 당나라 문종이 절을 지을 터를 찾고 있었다. 하루는 꿈에 세수를 하는데 세숫대야의 물속으로 아름다운 경치가 보였다. 문종은 바로 이곳이 절을 지을 터라고 생각했다. 신하들에게 자신이 꿈에 본 경치를 설명하고 그곳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문종의 신하들은 결국 그 절터를 찾아 신라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때 대견사가 현재 위치해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들은 당나라로 돌아가 문종이 꿈에 본 곳이 신라 비슬산에 있음을 보고했다. 크게 기뻐한 문종은 그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다. 문종은 절을 지을 하사금도 내렸다."​

대견사는 일연 스님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일연 스님이 1227년 22세의 나이로 승과에 장원급제하여 초임 주지로 온 이래, 22년간을 주석한 곳으로 삼국유사 자료수집 및 집필을 구상한 사찰이다. 몽고의 3차 침략(1235-1238) 이후 일연 스님은 주석처를 옮기게 되는데 이후 대견사는 쇠퇴하게 된다. 이후 고려말에 대견사는 다시 중수되었고, 조선 태종 2년(1402년)에 당시 관료였던 이첨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창되면서 사찰명도 보당암에서 대견사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대견사는 임진왜란으로 폐사가 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그러다가 광해 3년(1611년)과 인조 11년(1633년)에 다시 중창되어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18세기에 접으들면서 사세를 급격하게 위축되고 만다. 

하지만 1900년 이재인(李在寅)이 영친왕(英親王)의 즉위를 축원하기 위해 위축(位祝)을 신설하면서 다시 중창되었다. 영친왕은 대한 제국 마지막 황태자로, 대견사는 영친왕을 축원하기 위한 대한 제국 황실의 원당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가 영친왕을 인질로 잡아간 직후인 1908년에 위축이 폐지되면서 몰락하였고, 1909년에 폐사하였다. 그리고 1917년 6월 『조선 총독부 관보』에 “대견사를 폐지한다”고 공시하면서 그 터만 남게 되었다.

​이러하듯 대견사는 일본에 의해 두 번씩이나 수난을 당한다. 임진왜란 때는 왜병들이 불을 질러서 없애버렸고 일제 시대 때인 1917년에는 조선총독의 명령에 의해 절이 폐사(廢寺)를 당한 것이다. 일제 시절 폐사의 명목적 이유는 대견사에 들쥐가 많아 전염병 발생이 우려된다는 이유이었지만, 실제는 풍수지리로 보면 대견사가 일본 대마도를 바라보는 형국인데 대견사의 기운이 대마도를 빨아들이는 형국이기 때문에 대견사의 위치가 일본의 기운을 다스리는 아주 중요한 혈 자리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기를 꺾는다는 이유로 강제 폐사된 대견사는 100여 년만인 2014년 3월 1일 삼층석탑, 석축, 우물, 마애불 등만 남아 있던 절터에 동화사와 달성군이 총 50억원의 예산을 들여 대웅전, 선당, 종무소, 산신각 등으로 다시 중창되었다. 대견사의 산문을 여는 날을 3월 1일을 잡은 것은 일제에 의한 대견사의 강제 폐사에 일제에 항거해 독립만세를 외쳤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것일 것이다.


대견보궁(大見寶宮). 대견보궁 뒤편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적멸보궁이다. 대견사에 봉안한 진신사리는 2013년 11월 22일 동화사가 스리랑카 쿠루쿠데사원에서 모시던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기증받아 이를 대견사로 이운한 것이다. 이 진신사리는 서기 103년부터 스리랑카 도와사원에서 보관해오다 1881년부터 쿠루쿠데 사원에 모셔진 사리 4과중 하나다.

내가 방문했을 때, 대견보궁에서는 불교대학에서의 나한기도가 한창이었다. 모든 분들의 지성어린 기도에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 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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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견사지 삼층석탑(대구유형문화재 42호). 원래는 9층 석탑으로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절을 조선 인조 시절 재건하면서 3층 석탑으로 재탄생했다고 한다. 일제 총독부가 대견사를 폐사시켰을 때도 그 탑만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이곳에 대견사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