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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과 원효의 법력이 숨쉬는 포항 운제산 오어사

산풀내음 2018. 10. 23. 19:22




포항에는 고찰들이 여럿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찰이라면 내연산의 보경사와 운제산(雲梯山, 478m)의 오어사라 할 것이다. 오어사(吾魚寺)는 그 이름이 특이하다. 사람에게 각자의 이름이 있듯이 사찰에도 이름이 있다. 귀신사(歸信寺)​와 같이 듣기에는 다소 이상한 듯하지만 그 뜻을 살피면 '믿음으로 돌아온다'가 될 것이니 얼핏 들었을 때의 오싹함과는 달리 아름다운 이름이다. 또 한편 오어사(吾魚寺)​와 같이 그냥 들었을 때에는 어떤 의미인지 잘 알 수도 없고 또한 거부감도 없지만,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내 물고기'란 뜻이 되기 때문에 사찰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사찰의 이름 뒤에는 그와 얽힌 뜻 깊은 이야기가 있는 경우가 많으니 오어사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자의 뜻을 그대로 해석하면 '내 물고기'라는 뜻인데, 이에는 원효대사와 혜공대사의 법력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오어사가 있는 운제산도 그 이름과 관련하여 두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운제(雲梯)라 하면 구름 운에 사다리 제로 직역하면 '구름다리'가 될 것이다. 이는 원효대사가 원효암에서 수도할 때 계곡 사이에 구름다리(雲梯)​를 놓고 자장암으로 건너다녔다고 해서 ‘운제’라고 붙여졌다는 설과 신라 2대 남해왕비 운제부인의 성모단이 있어 운제산으로 명명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오어사는 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진평왕(579~631)​ 때 창건하여 당시에는 항사사(恒沙寺)라 하였다. ‘항사’란 ‘갠지스 강의 모래알’을 말한다. 일연스님은「삼국유사」에 ‘전하는 말에 항하수의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세속을 벗어났으므로 항사동(恒沙洞)이라 부른다’고 절 이름에 담긴 뜻을 각주로 풀이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지금도 항사리이다.​

당시에는 원효대사도 자문을 구할 정도로 큰스님이었던 혜공대사가 계셨다. 혜공(惠空)은 소싯적부터 많은 이적을 일으키다가 승려가 되어서는 삼태기를 메고 다니며 대취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는 등 파격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행동에 아무 거침이 없었던 혜공이 만년에는 이곳 오어사, 당시에는 항사사에 머물렀다. 이때 원효는 이 절 인근 원효암에서 여러 불경의 소(疎)를 지으면서 의문이 생기면 늘 혜공을 찾아와 묻고, 농담도 즐겼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혜공과 원효는 서로의 법력을 겨루고자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는 똥으로 배설된 물고기를 되살리는 시합을 하였다. 불행이도 한 마리는 살지 못하고 다른 한 마리는 살아서 힘차게 헤엄쳐갔다. 이를 본 두 사람은 서로 자기 물고기라고 해서 ‘나 오(吾)’, ‘고기 어(魚)’자를 써서 오어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고기를 놓아준 곳이 지금의 오어지(吾魚池)이다.​

이런 연기 설화는 물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고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것과 같은 논리로 또는 비언어적인 화두공안의 하나로 불 수 있을 것이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이후 상당 기간동안 불교는 왕실과 귀족들만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혜공과 원효를 비롯한 뜻있는 승려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과 삶의 애환을 함께 하며 민중불교의 새벽을 열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혜공대사의 삼태기를 메고 다니며 대취한 점, 원효대사의 파계 등도 불교의 대중화와 보살행의 실천이라는 대의적 측면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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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의 법력과 관련하여 '법보신문(http://www.beopbo.com/)'에 다룬 내용이 있어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혜공은 신라 귀족 천진공(天眞公) 집에서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노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가 전 이름은 우조(憂助). 항생제가 없던 그 시절 심한 종기를 앓던 천진공이 급기야 죽음에 직면했다. 그의 인격 꽤 괜찮았는지 마을 사람들이 병문안 가려 줄을 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7살의 우조가 어머니에게 말한다. “제가 공(公)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당치 않는 얘기로 들렸겠지만 어린 아이가 어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 자체가 신기해 어미는 공에게 그 일을 전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터. 공이 사람을 시켜 우조를 부른다. 우조는 침상 아래 말 없이 앉았다.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흘렀다. 그러자 천진공의 종기가 터지더니 고름이 쏟아졌다. 천진공은 목숨을 건졌다. 허나 천진공을 비롯한 그 누구도 우연의 일치라 여겼을 뿐 우조가 병을 치료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때 우조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아니, 내가 공의 병을 고친 걸 아무도 모른단 말인가?’

매 보는 눈이 탁월했던 천진공을 위해 우조는 똘똘해 보이는 매 한 마리를 길렀다. 천진공이 보고는 마음에 들어 했다. ‘잘 길러서 갖다 달라’했을 터. 어느 날 관직을 얻은 동생이 좋은 매를 청해오기에 천진공은 매 한 마리를 점지해 줬고 동생은 받아 돌아갔다. 그 때 생각났다. 우조의 매! 동이 트는 대로 아침 일찍 사람을 시켜 우조에게 그 매를 가져오라 명하려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천진공은 하인을 부를 필요조차 없었다. 우조는 동틀 무렵 매 한 마리 안고는 천진공 대문을 두드렸다.

천진공은 그제야 알아 챘다. 자신의 고름병을 고쳐 새 삶을 선사해 준 사람이 우조였다는 사실을! 우조에게 절을 올렸다. “성인이 저희 집에 오신 줄 몰랐습니다. 무례한 언행으로 성인을 욕되게 했으니 그 죄를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십시오!”신령스런 일을 보인 우조는 그 즉시 출가하고는 ‘혜공(惠空)’이라 했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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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원효보다 혜공이 내외전, 선교 전반에 걸쳐 앞선 듯 싶다. ‘삼국유사’속 이야기 한 토막 들어보자. 원효가 여러 경전의 주해를 지으면서 매번 혜공스님을 찾아 가 의심나는 것을 물었다. 어느 날, 두 조사는 물고기를 먹고는 돌 위에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원효의 대변을 가리켜 그 유명한 한 마디를 던진다.

'여시오어(汝屎吾魚)'

한자를 풀어 보면 “네 건 똥이고 내 건 물고기다!”.

이후 이 이야기는 '원효와 혜공 스님이 물고기를 잡아먹고는 똥으로 배설된 물고기를 살리는 시합을 벌였다. 두 조사 모두 물고기로 살려냈으나 한 마리는 살지 못해 죽었고, 다른 한 마리만 살아서 힘차게 헤엄쳐 갔다. 이를 본 두 사람은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라며 “내(吾) 고기(魚)”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원래의 절 이름 항사사(恒沙寺)가 그 사건 이후 ‘내 물고기’의 오어사(吾魚寺)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혜공은 정말이지 신출귀몰 했던 조사였다.

‘혜공이 우물에 들어가 몇 개월 동안 머무르다 나와도 옷이 젖지 않았고 항상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 나왔다.’

‘신라 땅에 최초로 밀교를 전파한 명랑법사가 금강사(金剛寺) 창건 법회를 할 때 당대의 유명한 스님들이 운집했는데 혜공 조사가 보이지 않자 향을 사르며 경건하게 기도하자 어느 순간 혜공 조사가 나타났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옷과 발에 진흙 한 덩이조차 묻지 않았다.’

혜공은 생전에 인연 따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공성(空性)과 불이(不二)와 반야의 진면목을 담은 ‘조론(肇論)’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이 책은 내가 예전에 지은 것이다.”‘조론’은 중국 승조(僧肇)가 지었다. 승조는 384년에서 414년까지 활동했던 인물이다. 승조법사 사후 약 200년 만에 혜공으로 몸을 갈아 입고 환생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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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혜공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혜공은 공중에 떠올라 입적을 고했다!’

출처 : 법보신문, "45. 운제산 오어사-원효암-자장암",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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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어사는 자장(慈藏), 혜공(惠空), 원효(元曉), 의상(義湘)의 네 조사(祖師)와 인연이 있다. 즉, 절의 북쪽에 자장암과 혜공암, 남쪽에 원효암, 서쪽에 의상암 등의 수행처가 있고 이들 네 조사의 행적과 연관짓고 있다. 지금은 자장암과 원효암만 남아 있고 혜공암과 의상암은 사라진지 오래다. 오어사 경내에는 대웅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52호)을 중심으로 나한전(羅漢殿), 설선당(說禪堂), 칠성각, 산령각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을 제외한 전각들은 모두 최근에 건립된 것이다. 운제산에는 오어지(吾漁池)를 맞대고 있는 오어사 외에도 기암절벽 꼭대기에 둥지처럼 내려앉은 자장암(慈藏庵), 사색하기 좋은 오솔길이 있는 원효암(元曉庵), 그리고 오어지를 끼고 돌 수 있는 걷기 좋은 둘레길이 있다.​

오어사의 가람의 배치는 다른 사찰들과 다소 다르다. 대웅전이 중심에 배치되어 있고 그 뒤로 나한전과 산령각 등이 있다. 대웅전을 기준으로 그 앞쪽에 원효암이 있고 뒷편에는 자장암이 위치해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어사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나온다. 바로 직전에 자장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10-15분 정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자장암이다. 원효암을 가기 위해서는 대웅전을 지나 계속가면 관음보살상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면 원효암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곳 또한 산길을 따라 10-15분 정도 오르면 된다. 두곳 모두 주불전은 관음전이다. 참고로 자장암의 경우에는 오어사를 통하지 않고 차량으로 직접 이동할 수도 있다.


대웅전은 조선 영조 17년(1741)에 중건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 형식의 팔작집으로, 천장이 화려하게 조각돼 있고, 정면의 꽃창살에 새겨진 국화와 모란이 그윽한 멋을 더한다.


오어사 관세음보살입상, 멀리 뒷편으로 자장암이 보인다.



오어사 원효암


원효암 가는 길

원효암

원효암 관음전과 요사채. 원효암은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내려오는 전설이나 1954년에 지은 '원효암 중건기'에 따르면 오어사에 있던 원효가 암자에 거처하면서 운제산의 구름을 타고 자장암을 건너다니며 혜공과 교우하였다고 한다. 1937년에 산불로 전소되었다가 이듬해 중건하였고, 1954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전각은 관음전과 삼성각, 그리고 요사 등이 있다. 이들 전각은 최근에 다시 지어졌다.



오어사 자장암


자장암 관음전

자장암 관음전 앞에서 바라본 모습

자장암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신라 진평왕 즉위시기인 서기 578년경 자장과 의상이 수도할 때 오어사와 함께 창건된 암자로서, 운제산(600m)의 정상에서 동남방간으로 급히 굽이치듯 내려오는 100m에 이르는 바위절벽의 봉우리(일명 천자봉)에 있다. 자장암의 가람구성은 법당과 삼성각, 그리고 요사로 이루어져 있다. 삼성각 뒤에는 1998년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세운 세존진신보탑이 있다.

이곳에 봉안한 석가여래 진신사리분은 태국 사원에서 봉안하여 있던 것을 당시 태국 유학승이셨던 정신스님이 그 일부를 기증받아 모시고 있다가 그 중 7과를 1998년 6월 3일(음력) 자장암 주지 삼현스님에게 기증한 것이다. 


오어사 입구의 흔들다리를 지나 오어지를 끼고 걷는 둘레길은 원점회기코스로, 전체는 7km, 약 2시간 동안 운제산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