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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不作 一日不食(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의 정신이 살아있는 봉암사에 다녀오다.

산풀내음 2019. 5. 19. 17:18




부처님 오신날을 빼고는 1년 내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사찰이 있다. 경북 문경 희양산(曦陽山) 자락의 봉암사(鳳巖寺)가 바로 그곳이다. 새벽 4시에 잠에서 깨어 출발. 7시에 절문을 연다고하여 너무 일찍 서둘렀다는 생각으로 도착한 시간이 6시 반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전혀 근거 없는 나만의 착각'이었다. 사찰에서 미리 준비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겨우 주차하는 수준이었다. 미리 전날부터 와서 1박을 하며 기다리는 불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사찰에서 준비한 셔틀버스를 타고 봉암사 입구에 도착해서 약 10분 정도 계곡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천년고찰 봉암사가 나온다. 일년에 단 한번 대중에게 공개되어서인지 때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흠쁙 빠져들었다.




봉암사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 신라 헌강왕 5년(879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지선(智詵, 824~882, 智證大師, 호 道憲) 스님이 창건했고,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지선(지증대사)께서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 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 구산선문(九山禪門)​


대승교학 특히 화엄이 찬란히 꽃피고 전성하였던 신라불교는 신라하대도로 내려오면서 차츰 침체되고, 교학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선이라는 파격적인 불교사상이 중국으로부터 전해져 선문이 형성되었다.

신라에 선이 처음 전래된 시기는 법랑(法郞)이 중국선조 제4조 도신(580 - 651)의 법[東山法門]을 전해온 선덕왕(632 - 647) 또는 진덕왕(647 - 654)무렵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 전래는 41대 헌덕왕(809 - 826)이후이며, 마조도일 계통의 선[洪州宗]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로부터 고려초에 이르는 기간동안 줄기차게 선의 유입과 정착이 이루어져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형성된다.

(출처 : 불광미디어, "[알기쉬운 교리강좌] 선의 전래와 구산선문(九山禪門)")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후임 원행, 법연스님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 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출처 : 봉암사 홈페이지)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1947년 10월, 경북 문경 봉암사. 성철(性徹) 스님을 비롯, 청담(靑潭), 자운(慈雲), 우봉(愚峰) 스님 등 당대의 30~40대 선승(禪僧) 네 분이 모였다. 조선 왕조 500년간의 억불(抑佛) 정책과 일제가 들여온 왜색 불교의 여파로 전통 한국 불교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불교를 다시 일으키자는 '봉암사 결사(鳳巖寺 結社)'를 한다. 그리고 자발적 노동, 탁발, 참선수행, 포살 실시, 능엄주 암송, 자주ㆍ자치 구현, 청규와 계율의 준수 등 결사의 세부적 행동지침이라 할 수 있는 17개 항목의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정하고 철저히 지켜나갔다

1. 엄중한 부처님의 계율과 숭고한 조사들의 가르침을 온힘을 다하여 수행하여 우리가 바라는 궁극의 목적을 빨리 이룰 수 있기 바란다.(森嚴한 佛戒와 崇高한 祖訓을 勤修力行하야 究竟大果의 圓滿速成을 期함)

2.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개인적인 의견은 절대 배제한다.(如何한 思想과 制度를 莫論하고 佛祖敎勅 以外의 各自 私見을 絶對 排除함)

3. 일상에 필요한 물품은 스스로 해결한다는 목표 아래 물 긷고 나무 하고 밭일 하고 탁발하는 등 어떠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日常需供은 自主自治의 標幟下에서 運水 搬柴 種田 托鉢 等 如何한 苦役도 不辭함)

4. 소작인의 세금과 신도의 보시에 의존하는 생활은 완전히 청산한다.(作人의 稅租와 檀徒의 特施에 依한 生計는 此를 斷然淸算함)

5. 신도가 불전에 공양하는 일은 재를 지낼 때의 현물과 지성으로 드리는 예배에 그친다.(檀徒의 佛前獻供은 齎來의 現品과 至誠의 拜禮에 止함)

6. 용변 볼 때와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늘 오조가사를 입는다.(大小二便普請及就寢時를 除하고는 恒常 五條直綴을 着用함)

7. 사찰을 벗어날 때는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으며 반드시 함께 다닌다.(出院遊方의 際는 戴笠振錫하고 必히 同伴을 요함)

8. 가사는 마나 면으로 한정하고 이것을 괴색한다.(袈裟는 麻綿에 限하고 此를 壞色함)

9. 발우는 와발우 이외의 사용을 금한다.(鉢盂는 瓦鉢 以外의 使用을 禁함)

10. 매일 한번 능엄대주를 독송한다.(日一次楞嚴大呪를 讀誦함)

11. 매일 두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다.(每日 二時間 以上 勞務에 就함)

12. 초하루와 보름에 보살대계를 읽고 외운다.(黑月白月 菩薩大戒를 講誦함)

13. 공양은 정오가 넘으면 할 수 없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佛前進供은 過午를 不得하며 朝食은 粥으로 定함)

14. 앉는 순서는 법랍에 따른다.(座次는 戒臘에 依함)

15. 방사 안에서는 반드시 벽을 보고 앉으며 서로 잡담은 절대 금한다.(堂內에는 座必面壁하야 互相雜談을 嚴禁함)

16. 정해진 시각 이외에 누워 자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定刻以外의 寢臥는 不許함)

17. 필요한 모든 물건은 스스로 해결한다.(諸般物資所需는 各自辯備함)

18. 그 밖에 규칙은 청규와 대소승의 계율 체제에 의거한다.(餘外의 各則은 淸規及大小律制에 準함)

이상과 같은 일의 실천궁행을 거부하는 사람은 함께 살 수 없다.(左記條章의 實踐躬行을 拒否하는 者는 함께 사는 일을 不得함)

“부처님 법이나 조사(祖師, 한 종파를 처음 세운 사람) 스님 법에 틀렸으면 지적해서 고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하고 실천하자. 곧 내일모레 굶어 죽는 한이 있다 해도 (부처님) 법대로, 법 가깝게 우리 한번 살아보자”는 원(願)을 세웠다.

(성철 스님의 84년 월간 ‘해인’ 기고문 중에서).

이렇듯 결사의 정신은 '부처님 법(法)대로 살자'.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 정신이었다. 네 분으로 시작한 결사는 향곡(香谷), 월산(月山), 종수(宗秀), 도우(道雨), 성수(性壽), 법전(法傳) 스님과 묘엄(妙嚴) 등 비구니 스님까지 가세해 식구가 30여 명까지 늘었다.

법전(法傳) 스님의 회상기(『가야산 호랑이를 만나다』)를 보면 당시 살벌했던 분위기가 생생하다. 글에 따르면 성철 스님은 동료·제자 스님들의 참선 집중도가 떨어진다 싶으면 “밥값 내놓아라!”라고 쩌렁쩌렁 고함 치며 한바탕 소동을 벌이곤 했다. 뺨을 후려치는 건 기본, 한겨울에 물벼락을 맞거나 성철 스님이 던진 놋쇠 향로를 머리에 뒤집어 쓴 스님도 있다고 한다. (출처: 중앙일보, "밥값 내놓아라" 봉암사 큰스님, 뺨 후려치며 소동)

결사는 재가불자에게도 급속히 번졌다. 봉암사에 밀려든 불자들을 대상으로 보살계 법회를 봉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스님-신도간 위계질서가 구축됐다. 재가자가 스님들에게 예를 표하는 삼배의례도 이 당시부터 정착됐다. 법회에서 법단 내 중단예불이 폐지됐고 〈반야심경〉 독송의례가 보편화됐다. 이는 봉암사 결사가 불교의 대중화에도 큰 획을 긋게 된 배경이다. 보살계 법회 뿐 아니라 공양물의 평등성 등도 단적인 예다.

2년여간 전개된 결사는 1949년부터 서서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봉암사 인근에 빨치산이 출몰하면서 사찰 인근에 경찰이 자주 출입했고 급기야 수행생활에 지장은 물론 수좌스님들의 생명에 위협까지 받게했다. 끝내 1949년 9월 봉암사에 보관됐던 도서는 부산의 묘관음사로 이전됐고 대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출처 : 불교신문, "③ 봉암사 결사 무엇을 남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와해된 봉암사 결의이지만 1954년부터 본격화된 불교정화 운동 추진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봉암사 결사에 동참한 대다수의 수좌스님들은 정화운동을 주도하거나 합류했다.

1970년 초부터 봉암사로 공부하는 수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했고 산문을 폐쇄해 일반인·등산객·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했다. 최고의 참선 수행 환경을 위해서다.

하지만 또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는 희양산은 2000년부터 산 주변의 광산과 대규모 레저단지 건립계획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희양산의 가장 넓고 깊은 터에 자리 잡은 봉안사의 참선 수행 환경 뿐 만 아니라 그 동안 지켜온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눈 앞의 현실이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봉암사를 봉암사답게 가꾸고 지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고민 끝에 나온 의견이 봉암사를 보호지구로 지정해 영구히 지켜가자는 것이었다. 봉암사가 주도하고 조계종 총무원이 합심했어며 녹색연합의 도움도 있었다.

결국 2002년 봉암사가 희양산 일대의 사찰림이 국가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된다. 현행법상 국가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면 일체의 개발행위는 물론 실질적인 사유권 행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는 사유지를 공익적인 차원에서 희생한 경우라 할 것이다. 중생구도를 위한 수행 정진의 터를 지킴과 동시에 그 동안 가꾸고 지켜온 자연환경을 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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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에서 계곡을 따라 700m 쯤 오르면 백운대 혹은 옥석대(玉石臺)​라 불리는 넓은 암반위의 거대한 암괴에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보살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이 있다.

산내 부속암자로는 절 북쪽 중턱에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871년(고종 8)에 유겸(裕謙)이 중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