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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신앙(轉經信仰)’의 보고, 예천 용문사에 다녀오다.

산풀내음 2019. 7. 13. 22:19




모처럼의 장거리 운전이었다. 지난 주에는 혼자 양평에 있는 용문사를 다녀왔고, 오늘은 우리나라 전경신앙의 보고라 할 수 있는 경북 예천의 용문사(龍門寺)​로 발길을 옮겼다. 용의 머리인 경기 양평의 용문사와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경남 남해의 용문사와 더불어 신라 3대 용문사(龍門寺) 중에 한 곳인 이곳은 용의 심장이라고 일걷는다. ​예천 용문사는 신라의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신라 경문왕 10년(870년)에 개창한 절이다.


신라의 두운선사는 범일국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법을 전해  받고 신라로 돌아왔다. 당나라에 다녀온 뒤 두운선사는 신라 경문왕 10년 (870) 이 곳에 초막을 짓고 두운암(杜雲庵)이라는 암자를 지었는데, 동국여지승람과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에 따르면 어느 날 두운선사가 만행을 하다가 소백산 자락에 이르렀을 때 두 마리의 용이 험난한 산길을 인도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두운암의 자리라고 한다. 두운선사는 헌강왕 9년(883년)에 소백산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한 인물이기도 하며, 호랑이 목에 걸린 가시를 손을 넣어 빼주고 호랑이에게 잡힌 처녀를 겨우내 보살펴 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편 궁예의 태봉, 견훤의 후백제가 기울어진 신라를 대신하기 위해 패권을 다툴 당시 왕건(王建)은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남하하던 중 두운선사의 명성을 듣고 이곳을 찾았는데 때마침 운무(雲霧)가 자욱하여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헤맬 때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서 길을 인도하였다고 한다. 또한 ​왕건은 용문산 아래 영천 팔공산에서 견훤 군대로부터 기습 받아 간신히 목숨만 건지는 위기를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마침내 고려를 건국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용문사를 크게 일으키고 고려 왕조 내내 밀접한 연관을 맺었다. ​태조 19년(936년)에 칙명으로 이 절에 30칸의 건물을 지어 중건하였고 그 이름을 용문사라고 하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명종 1년(1171년)에 황태자의 태(胎)를 묻는 곳을 절문 밖 왼편 봉우리에 정하게 되면서 이후 창기사(昌期寺)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고, 세종의 비 소현왕후의 태실을 봉안하고 다시 '성불산 용문사'로 고쳤으며, 정조 때 문효세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소백산 용문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은 '회전문(廻轉門)'이다. 처음 듣고 보는 문이라 어떤 의미인지를 찾아보니 회전(廻轉)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로 일반사찰의 사천왕문(四天王門)에 해당한다라고 한다. 


회전문을 지나면 회운루라고 하는 전각이 나오고 그 사이로 용문사의 주불전인 보광명전이 보인다.






보광명전. 용문사의 주불전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모셔져 있다. 특히 아미타불상에서는 1515년에 중수한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천년고찰 용문사에는 세 가지의 이적(異蹟)이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먼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삼한통일을 위하여 남정(南征)하는 길에 두운대사를 방문하고자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 청룡(靑龍) 한 쌍이 나타나 어가(御駕)를 환영하기에 왕이 이를 기뻐하여 용문사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다른 하나는 두운대사가 절을 짓기 위해 이 곳에 이르렀을 때 바위에서 홀연히 진룡(眞龍)이 나와 영접하였다고 하여 산 이름을 용문산(龍門山), 사명(寺名)을 용문사(龍門寺)라 하였다 한다.


둘째, 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가 16냥(兩)이나 되는 은병(銀甁) 하나가 나와 그 것을 팔아서 공사비에 충당했다고 하며,


셋째, 1171년(명종 원년)에는 도량의 남쪽 9층의 청석탑(靑石塔)에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이 때 오색(五色)의 구름이 소반을 에워쌌다고 전해온다.​

1984년에는 초파일 다음날 화재로 인하여 해운루, 영남제일강원 등 많은 건물이 전소(全燒)되었다. 당시 응향각에는 조선 세조 때 스님들의 잡역을 면제케 해준 교지가 대형 금고 속에 있었는데 이때 이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변진용(당시 20세)이라는 학생은 장정 4명이 목도를 이용해도 억지로 들 수 있는 육중한 금고를 초인적(超人的)인 힘으로 요사채 안방에서 문턱을 넘어 마당까지 굴려 떨어뜨려 귀중한 문화재를 구했다.

특히 응향각을 삼킨 불이 2m 이내에 있는 단하각(丹霞閣)에 접근하자 30여 명의 용문면사무소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을 헤쳐 들어가 단하각을 허물어 바로 옆에 있는 대장전(大藏殿)이 화(禍)를 면하였는데 그 안에는 윤장대 1쌍(雙), 목각좌상 및 후불탱화 등 이 절을 상징하는 귀중한 문화재가 있어서 이는 부처님의 음덕(蔭德)과 가호가 있었다고 한다. 대장전 기둥과 벽에는 연꽃, 붕어, 도깨비(鬼面) 등 그림이 있는데, 이들은 물을 상징하는 부적(符籍)으로 화마(火魔)를 막는 역할을 하였다고도 한다

또한 불이 나기 전인 4월 5일(陰) 주지스님의 꿈에 사천왕상(四天王門) 전면에 5색 연기가 자욱하게 나고 많은 군중이 법당을 향해 절을 하는 꿈을 꾸어 잠을 설쳤다고 하며, 4월 7일(陰) 사찰 현장에 근무 중이던 용문면 산업계장은 비몽사몽(非夢似夢) 간 큰 법당 부처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꿈을 3번이나 되풀이 꾸어 놀라 잠을 깨어 보니 꿈이었으므로 방심하여 부처님의 계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화재(火災)를 막지 못하였다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당시 “용머리를 깼으니 불이 안날 턱이 있겠느냐?”는 소문이 자자하였는데 이는 불이 나기 며칠 전 면(面) 경계지점인 용문면 하금곡리 포장 공사장에서 용머리 바위를 폭약으로 깨트려 용문사(龍門寺)를 지키는 수호신인 용(龍)이 화가 나서 불을 냈다는 말이 지금도 전해온다. (출처 : 예천군 홈페이지)

용문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대장전(大藏殿, 보물 145호)과 그 안에 보관되어 있는 용문사 윤장대(龍門寺 輪藏臺, 보물 684호)이다.


대장전은 보광명전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바로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그 옆으로 조금 더 가면 명부전과 응진전이 있다.


대장전은 용문사 경내에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고려 명종 3년(1173년)에 지은 것으로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며 1984년 용문사 화재 당시 유일하게 화마를 피한 전각이다. 조선 현종 6년(1665년)에 다시 지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17세기에 중수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한편 대장전과 관련하여서는 인도의 고승이 대장경을 용궁에 소장하였다는 고사에 따라 용이 나타났다는 이 곳에 대장전을 짓고 부처님의 힘으로 호국을 축원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용문사에는 대정전보다 더 유명한 보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대장전에 보관되어 있는 두개의 윤장대(輪藏臺)이다. 높이 4.2m, 둘레 3.3m의 크기이며, 마루 밑에 회전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 8면의 서가를 돌리면서 경전을 꺼내 볼 수 있도록 되어있는 윤장대는 고려 명종 3년(1173년)에 자엄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현존하는 고려시대 윤장대로 유일한 것이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장대는 본래 승려들이 경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중생을 위해 돌리는 것 만으로도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회전식 불경 보관대’이다. 8백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중생과 함께 해온 이 윤장대가 언젠가부터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됐고, 이를 1998년 주지로 부임한 청안스님이 정부의 지원을 끌어내 보수하고 다시 돌릴 수 있도록 했다. 현재는 삼짇날(음력 3월 3일)과 중양절(음력 9월9일) 등 1년에 이틀만 윤장대를 돌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윤장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중국 양나라의 부흡(傅翕)이라는 사람에 의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그는 540년 송산에 쌍림사(雙林寺)를 세우고 대장경 열람에 편리하도록 윤장을 고안했다고 하는데, 윤장이라는 것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문고판과 같은 작은 책들을 한 곳에 모두 꽂아 두고 책장을 돌려가며 찾기 쉽게 만든 책꽂이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윤장은 당초 경전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후에 이것을 돌리기만 해도 경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고 또한 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 전경신앙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 "용문사 윤장대")

* 예로부터 수가 겹치는 날을 절기로 삼아 왔는데 1월 1일 설날,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 7월 7일 칠석, 9월 9일 중양 등이 그것이다. 삼짇날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날이기도 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2 경덕왕 충담사조에 보면 경덕왕이 3월 삼짇날에 귀정문(歸正門)에 올라 훌륭한 스님을 모시려 하다가 찬기파랑가로 유명한 충담스님(충담사)을 모시게 되었다. 왕이 어디서 오는 길인지를 묻자 스님이 답하기를 “소승이 매년 3월 삼짇날과 9월 9일에는 차를 다려 경주 남산의 삼화령에 계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지금도 차를 올리고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 라고 하였다니 오래전부터 삼짇날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상서로운 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불교신문, "강남 갔던 제비 돌아오는 날⑬ 삼짇날")


용문사 대장전에는 또 하나의 보물이 있다. 보물 989호로 지정된 목불좌상 및 목각탱(大藏殿木佛坐像 및 木刻幀)이 그것이다. 오직 조선시대에서만 볼 수 있는 종교 미술품인 목각탱은 평면적인 불교회화를 나무 조각으로 입체화시킨 것이다.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 뒷면에 봉안된 후불목각탱은 숙종 10년(1684년)에 제작된 것으로 17세기 후반 조각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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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전 내의 목불좌상 및 목각탱(大藏殿木佛坐像 및 木刻幀)


명부전


응진전. 명부전과 응진전은 대장전에서 조금 더 오른 편에 있다.

관음전과 천불전은 주불전인 보광면전 뒤편에 위치해 있다.

관음전에 모셔져 있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