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경북

선무도의 고향, 골굴사

산풀내음 2019. 8. 21. 20:45


남해 보리암과 용문사를 거쳐 이번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골굴사에 갔다. 함월산 자락에 함께 위치하고 있으며 골굴사를 창건하신 광유스님께서 창건하신 기림사도 들려볼까 고민도 하였지만 골굴사에서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기도를 올리고자 기림사는 다음을 기약하였다.

우리에게 선무도로 더 잘 알려진 골굴사(骨窟寺)는 6세기 경인 선덕여왕 때 인도에서 건너온 광유스님 일행이 함월산 지역에 굴을 파고 암자를 지은 혈사(穴寺, 토굴)에서 수도 정진하면서 창건된 사찰이다. 이는 당시 그들의 사원 양식을 본 떠서 창건한 전형적인 석굴사원으로 12개의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 온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사원이다. 당시 기록처럼 지금도 12개의 석굴 흔적이 남아 있고, 이중 6개의 석굴이 현재에도 불공을 드리는 암자로 활용되고 있다.

골굴사는 인근의 기림사보다도 앞서 지어진 사찰로 원효대사가 입적한 혈사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기림사는 선덕여왕 때 골굴사를 창건한 광유스님 일행이 지은 사찰이다. 당초 임정사로 불리다가 원효가 확장 중수하면서 기림사로 개칭했다는 기록으로 원효가 기림사에 머물렀다는 것은 입증된다. 원효께서 분황사에서 150여권의 불교서적을 집필하고 고선사를 거쳐 기림사에 이르른 발자취도 각종 역사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편 원효께서는 617년 출생해 686년 혈사에서 입적했다고 기록은 있지만 정확하게 혈사의 위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기림사에 기거하다 혈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마무리되고, 당시 기림사 인근에 혈사가 있었던 곳은 골굴사가 유일하므로 골굴사에서 원효가 입적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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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굴사의 주불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마애여래좌상(보물 591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약사굴, 관음굴, 지장굴, 산신굴, 나한굴 등 크고 작은 석굴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 관음굴은 굴이 가장 깊고 넓으며 전실이 기와집으로 마련돼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석굴양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한편 관음굴에서 잠을 자고 나면 병들고 허약한 이가 생기를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함월산 골굴사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보물 제581호로 지정등록 관리되고 있다. 경주 전역의 불적들이 대부분 화강암 단단한 재질로 조성된 것과 다르게 골굴사 유적들은 대부분 사암과 이암, 석회암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쉽게 마모 훼손된다. 이를 우려해 경주시는 마애불상에 유리감실을 설치 보호하고 있다.


아래의 전각이 골굴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이며 그 앞에서 선무도 공연이 이루어진다. 위쪽에 보이는 바위 중간중간에 석굴이 있다.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581호로,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굴법당. 12처 석굴중 가장 넓은 굴법당으로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동굴의 벽면에 청동 108관음보살상을 원불로 봉안해 있다. 옛날에는 벽면에 마애불상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지장굴

산신굴

나한굴

칠성단

신중단

대적광전


조선후기 화재로 전소되어 폐사지로 남아있던 도량은 1990년 설적운 스님의 원력으로 현재의 가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설총의 후손, 즉 원효대사의 46대손인 설적운 스님은 기림사 주지를 거쳐 1990년 하반기부터 골굴사 주지를 맡아 당시 개인 사찰로 머물고 있었던 골굴사를 조계종의 사찰로 등록해 현재의 가람의 모습으로 발전시킨 분이시다. 특히 설적운 스님은 비전되어오던 '불교금강연관'을 선무도(禪武道)라는 이름으로 대중화, 체계화시킨 장본인이시기도 하다.

매일 오후 3시면 대적광전 앞에서 선무도 공연이 벌어져 이를 보기 위한 방문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특히 외국인들의 경주여행일정에 최근 선무도 체험일정은 약방의 감초처럼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다. 내가 찾은 날에도 선무도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모여든 순례객과 관광객들로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고, 특히 20여명의 외국인들이 템플스테이와 함께 참관하는 모습이 다소 이색적이었다. 

선무도 시범단에는 스스로 선무 2단이라고 소개하는 외국인도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영어로 공연과 골굴사의 유래에 대하여 간단하게 소개하고 그 다음으로 한국 스님께서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다. 선무도는 단순한 무술이 아니라 수행의 또다른 수단이며, 공연은 선무도의 보급 확대를 위하여 2011년부터 시작하였고 주중에는 선무도 시범에만 중점을 두고 있지만 주말의 경우에는 선무도 이외에도 국악 공연 등을 추가하여 하고 있다고 한다. 이전에는 하루에도 수차례 공연을 하였지만 지금은 매일 오후 3시 1회만 공연을 하고 있고 월요일은 공연이 없다고 한다.




골굴사에는 석굴과 선무도 이외에도 흥미로운 것들이 몇가지 더 있다. 그 중 하나가 동아보살이야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근바위와 여근이야기이다.


동아보살(冬兒菩薩)은 사람이 아니라 이 절의 주지스님이 암컷, 수컷 두 마리의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강아지가 바로 ‘동아보살’이다. 태어나고 얼마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부모개가 죽고 나서부터 동아보살은 예불을 드리기 시작했다. 이제 법당 들어가는 것은 기본. 선무도 수련하는 곳도 들락날락. 탑돌이까지. 스님들 하시는 건 다 따라하고, 밥을 먹을 때도 고기보다는 나물을 더 잘 먹었다는 동아보살! 이후 동아보살은 새끼 두 마리와 함께 예불을 드렸다고 한다.



동아보살공덕비(冬兒菩薩功德碑)


동아는 내가 골굴사 주지로 부임한 1990년 겨울에 태어나 나에게 입양되었으며 겨울에 태어난 아이라 하여 동아라 불렀다. 강아지 때부터 새벽예불을 대중들과 함께했으며 모든 행이 예사롭지 않았다. 


참선을 하고 탑돌이도 따라 하며 기도객들을 안내했다. 보통 진도견들은 가축이나 산짐승들을 해치는 습성이 변하지 않았지만 동아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KBS, MBC, SBS, 외국 TV 등에 여러 차례 방영되어 세간에 유명세를 타면서 20여 차례 강아지를 분양하여 1200여만 원을 사중에 보시하여 대적광전과 선무도대학 건립에 공덕을 지었으며 유럽에까지 그의 강아지가 분양되었다. 


만년에는 치매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나 죽는 날 아침까지 새벽예불에 참석했다. 지난 음력 2월 15일 극락보전의 아미타부처님 봉불식을 하루 앞둔 3월 29일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그 나름의 생을 입적하기 위해 동아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절을 떠났다. 


10여 일이 지난 뒤 오륜탑 언덕 넘어 양지바른 곳에서 동아의 죽음을 거두었다. 사중에서는 동아의 49재를 기부하고 매년 음력 2월 15일을 동아의 기제사 일로 정했다. 모든 불자들은 그를 동아 보살이라 불렀다. 


다음 생은 꼭 사람으로 환생하여 골굴사에 출가하는 인과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이다.


불기 2554년(2010년) 5월 16일


함월산 골굴사 주지 설적운 합장



골굴사에는 오래전부터 전래된 남근바위와 여궁의 음양조화로 득남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이 간직된 설화가 있기로 유명하다. 아들을 얻지 못한 부인들이 산신당 바닥(여근)에 자연적으로 패인 여궁을 덮은 판자를 깔고 앉아 밤새워 기도하면 아들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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