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5일

뉘른베르크법 공포

산풀내음 2016. 8. 21. 08:38

19359 15,

유대인 말살의 전조, 뉘른베르크법 공포

 

1935 9 10일 시작된 제7차 뉘른베르크 전당대회(9. 10~16) 도중 히틀러는 현지에서 제국의회를 소집, 통칭 뉘른베르크법이라 불리는 두 법안, 즉 독일 혈통 및 명예보존법(the Law for the Protection of German Blood and German Honor)과 제국 시민법(the Reich Citizenship Law) 9 15일 제정, 공포했다. 전자는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 및 성관계를 금지하는 법안이고, 후자는 유대인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는 법안이었다. 유대인 대학살의 서곡이 울려 퍼진 것이었다.


 

7차 뉘렌베르크 전당대회

 

이미 1933나치당의 당수 아돌프 히틀러가 제국수상으로 취임하면서 유대인 탄압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유대교 회당 방화, 돌격대의 유대인 상점 습격 등이 연달아 벌어진 이후 1933 4월 히틀러는 유대계 상점 보이콧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어 모든 유대인들이 전문직과 공무원직에서 사퇴할 것을 종용하는 법안이 통과됐고, 기존까지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던 유대인에 대한 독일 국적부여가 제한되기 시작했으며 도시 곳곳에서 유대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구역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33 7 14일 단종법(斷種法)을 공포, 유대인 말살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 법으로 40만 명이 단종수술을 강요당했고, 10만 명은 안락사 했다. 이어서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법까지 제정함으로써 유대인을 사회로부터 추방하고 급기야는 학살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법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됐다.

 

나치는 11 14일 부속법령으로 ‘유대인 분류 기준’을 확정했다. ()조부모 4명 중 3명 이상이 유대인이면 유대인, 2명이면 1급 혼혈, 1명이면 2급 혼혈. 이들은 제국 시민이 아니므로 투표권을 비롯한 모든 정치권 권리를 박탈 당했고, 당연히 공무원으로 일할 수도 없었다. 1,2급 혼혈은, 희망자에 한해 별도의 인종 재분류 심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실제론 무의미했다. 나치에게 중요한 것은 ‘아리안 순혈’이었다. 유대인은 이제 피를 다루는 의료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됐고, 45세 미만 가임기 독일 여성을 가정부로도 고용하지도 못했다. ‘열등 인종’인 유대인 남성이 독일 여성과 성관계를 가질 경우 사형에까지 처해지게 됐다. 붉은색 J(judeㆍ유대) 도장이 찍혔다.


 

마치 헨델의 우열의 법칙을 설명한 것처럼 보이는 위의 그림은 나치가 뉘른베르크 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그림이다.



나치는 유대인과의 교제를 금지했다. 유대인 남성과 독일 여성이 나치 앞에서 피켓을 들고 공개 망신을 당하고 있다.



유대인의 소상점을 강제 폐쇄하는 나찌

 

 

뉘른베르크법은 11 26일 흑인과 집시 등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됐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직후부터 조사와 기소 등 본격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비롯한 타 민족 및 인종 학살의 ‘법적 근거’가 바로 뉘른베르크법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법이 공포된 뉘른베르크에서 1945 11월 독일 전범에 대한 첫 번째 국제군사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의 법적 근거는 승전국들이 작성한 ‘국제군사재판 조례’였다. 재판은 11개월 동안 403차례의 공판을 거쳐 이듬해 10 1일 끝났다.

이 재판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전범들이 적법한 절차를 통해 적법하게 제정된 법을 기반으로 실행하였으므로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12명은 교수형, 3명은 종신형, 4명은 징역형을 각각 선고 받았다. 뉘른베르크는 2001 4월 ‘나치 잔재 청산의 상징’으로 유네스코 인권상을 수상했다. 사람이 아닌 도시가 이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