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5일

국내 첫 라면 삼양라면 생산

산풀내음 2016. 8. 21. 09:04

19639 15,

국내 첫 라면 `삼양라면` 생산

 

 

재미로 찾아보는 라면 로드_라면의 역사, 개발 그리고 발전

https://www.youtube.com/watch?v=JDUhGti6EEg&t=196s

 

1962 9 15일 우리나라 최초로 삼양라면을 출시되었다.

1960년대 초 한 그릇에 5원하던 ‘꿀꿀이 죽’을 사 먹기 위해 서울 남대문시장에 장사진을 친 배고픈 서민들을 본 데서 출발한다. 당시 삼양식품의 전신인 삼양식품공업주식회사의 창업주 고 전중윤 명예회장은 과거 일본을 방문했을 때 라면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전 회장은 ‘보릿고개’란 말로 대변되는 당시 우리나라 식량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길은 라면이라고 판단하고, 정부를 설득해 배당 받은 5만 달러로 일본 명성식품(明星食品)에서 기계와 기술을 들여왔고 그 결실이 이날 삼양라면 출시로 이어진 것이다.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

 

주황색 포장지에 중량 100g, 소비자가격 10원으로 출시된 삼양라면의 출발은 순탄치 못했다. 쌀밥을 선호하던 우리 국민은 밀가루로 만들어 기름에 튀긴 ‘꼬불꼬불한 국수’에 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라면을 옷감이나 실, 플라스틱 등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삼양식품 임직원과 가족들이 직접 가두판매에 나섰다.

 

 

 

 

1963년 처음 출시된 삼양라면()120g으로 중량을 늘린 제품(중간과 우)

 

삼양식품은 당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던 영화관이나 공원 등에서 1년 이상 무료시식 행사를 열고 밥과 국에 익숙했던 소비자들의 입맛을 바꾸기 시작했다. 마침 1965년부터 정부가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혼·분식 장려정책을 펴면서 단돈 10원으로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삼양라면의 장점이 입소문을 탔다. 삼양라면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라면이 국내에 소개된 지 얼마 안 된 1972 3월 삼양식품은 또 다른 획기적인 제품을 선보였다. 끓인 물만 부어 3분 후에 바로 먹을 수 있는 ‘삼양 컵라면’을 국내 최초로 출시한 것이다. 하지만 컵라면은 1990년 대 이후 보편화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 식량사정은 어려웠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계속된 외국 곡식 의존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매년 쌀과 보리, , , 옥수수 등을 수입했다. 1972년 이른바 녹색혁명으로 쌀의 자급을 이루기는 했지만 쌀 소비가 늘어나 여전히 외국에서 쌀을 수입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삼양식품의 라면 생산은 식량을 수급하고 외곡 수입을 절약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삼양라면은 출시된 1963년에만 쌀 3800여 석을 대체했다. 1976년에는 1458000여 석, 1980년에는 1848205석의 대체 효과를 거두었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삼양라면 판매 실적에 견주어 환산한 쌀 대체총량은 14827000여 석에 이른다. 1980년 환율 710 1로 환산하면 14억 달러 이상의 외화 절감 효과를 거둔 셈이다.

 

 

 

 

라면이 식사 대용으로 인기를 끌자 1965년 롯데공업은 롯데라면을 선보였다. 롯데라면은 최초로 쇠고기 국물을 사용하여 기존의 닭 국물과 차별화했다. 1975년에는 농심라면을 출시했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로 히트가 되면서 1978년 사명도 롯데공업에서 농심으로 바꾸었다.

 

 

 

 

 

 

 

이후 1980년대 한국야쿠르트, 오뚜기, 빙그레 등이 경쟁에 참여했고 시장이 과열되는 과정에서 1989년 삼양라면의 우지파동(공업용 쇠고기 기름을 사용했다는 의심)이 발생하면서 삼양라면은 1994년까지 판매가 중단되었다. 이후 1995년 삼양식품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기업 이미지 손상 및 라면 업계 부동의 1위 자리를 내 주는 등 유, 무형의 큰 피해를 입었다.

1990년대에는 컵라면 전성시대가 열리며 해외수출이 본격화됐다.

 

 

삼양식품 홈페이지에 게제되어 있는 삼양라면 우지파동 관련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