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산풀내음 2016. 8. 21. 08:58

19509 15,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개시



 

맥아더는 1950 6 29, 전쟁 발발 4일 뒤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무렵 미 지상군은 수원 부근에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북한군을 포위 섬멸하려는 블루하트(Blue heart)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후 계속적으로 발전시켜 9 15일을 예정일로 한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격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주장, 결국 8 28일 미 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

 

상륙작전은 동해에서 미 군함 미주리호로 삼척 근처에서 상륙작전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서해 최적의 상륙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 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작전으로 시작되었다9월 4일 상륙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9월 14일에는 영덕군에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와 동시에 맥아더는 고의로 군산상륙작전이라는 거짓정보를 흘렸으며 이 정보에 속아넘어간 인민군들은 군산의 방어를 강화하였고 그 결과 다른 지역의 방어력이 감소하였다당시 북한군의 인천지역 병력규모는 지역 경비대대를 포함하여 2,000여명에 달하였고 서울-인천 지역에서 활동 중인 적의 병력은 약 10,000여명으로 추정되었다.

 

9 15일 새벽, 7합동 기동부대 스트러블 해군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야함 등 8개국 261(미국 225, 영국 12, 캐나다 3, 호주 2, 뉴질랜드 1, 프랑스 1, 한국 15)의 함정과 제 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 선단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하였고 월미도에 상륙돌격을 감행할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 상륙단의 선제공격대가 인천 수로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1950 9 15일 지휘함 마운트 매킨리 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직접 지휘하며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작전의 제 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 106명이 포로로 잡혔고, 네이팜탄 투하 등으로 민간인의 피해도 컸다.



미 해병대의 월미도 공격

월미도에서의 인민군 시신들

 

2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군 제1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성공적으로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상륙직전의 병사들

상륙직전의 인천항

인천 상륙작전 당시 인천 해안 모습

생포한 포로들

파괴된 인민군 탱크들

파괴된 인민군 탱크를 살펴보는 맥아더장군

 

9 18일 미 해병대가 김포비행장과 구로를 점령하고 영등포에 육박하자 김일성은 만일 미군이 영등포역을 점령하면 북한군의 모든 보급이 중단되어 낙동강 전선에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9 18일 김책 전선사령관에게 부대를 금강과 소백산까지 후퇴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9 23일 인민군 13개 사단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인민군 총사령부는 총 퇴각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9 23일 서울 탈환을 앞두고 노량진에서 바라 본 끊어진 한강철교

 

9 27일 서대문 사거리 등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오후 3시경 중앙청을 확보하고 적의 깃발을 내렸다. 그리고 9 28일 인왕산의 북쪽 능선 일대를 완전히 확보하였고 오산에서 상륙한 미 제10군단과 낙동강에서 북상한 미 제8군이 합류가 되자 북한군의 조직적 저항은 끝났고 90일 만에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였다. 그리고 9 28일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환도식이 중앙청 내부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었다.

10 1일에는 38선을 돌파한 후 계속 북진하여 10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하고 10 26일에는 초산지역의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9 25일 현 신사동 일대에서 한강을 건너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9 25일 한강도하

9 27, 경인가도에서 서울 수복을 환영하는 인파들

9 27일 서울 시가전

1950 9 27일 해병대원들이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

9 28일 서울 수복 기념식

9 28일 중앙청에 유엔기를 게양하는 유엔군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 이후 아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이 걸렸으니 적의 배후를 불의에 공격한 인천상륙작전의 크나큰 성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