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5일

한국비료(韓肥) 사카린 밀수사건

산풀내음 2016. 8. 21. 09:15

19669 15,

한국비료(韓肥) 사카린 밀수사건 신문보도로 누출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29살의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은 대구 서문시장에 삼성상회를 열었다. 이후 1948년 대구를 떠나 삼성상회를 삼성물산공사(현 삼성물산)로 바꾸고 본격적인 무역업을 시작해, 불과 1년여 만에 무역업계 1위로 키웠다. 한국전쟁으로 사업기반을 잃었지만, 1951년 대구에 두고 온 양조장 사업 수익을 바탕으로 부산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1950~60년대에는 제일제당(1953)과 제일모직(1954)을 잇따라 설립하며 제조업에 뛰어들었고, 1957~59년 사이에는 안국화재(현 삼성화재)와 한일, 상업, 조흥은행 등을 잇따라 인수해 금융업에 손을 댔다.

1961 5.16 군사쿠데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약간의 고충이 있었지만 이를 통해 생긴 박정희와 이병철의 인연은 향후 벌어지는 각종 비리의 계기가 되었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면서 가장 시급한 것 중에 하나로 비료공장 건설을 꼽았다. 당시 비료는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기에 높은 비료 가격은 농민들의 고충으로 귀결되었던 것이었다. 이에 박정희는 이병철에게 비료공장 건설을 제안한다.

자유당 시절부터 비료공장 건설에 관심이 있었고 기본적인 청사진을 준비해 둔 상태였지만 이병철은 박정희로부터 더 큰 특혜를 얻기 위해 삼성은 그토록 큰 공장을 지을 수 있는 재력과 힘이 없다고 거절한다.

 

이병철은 결국 박정희와의 독대를 통해 정부의 지불보증이라는 엄청난 특혜를 얻어 냈고 이를 통해 정부보증 민간차관으로 비료공장 기계를 일본 미쓰이물산에서 수입하면서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현 가치로 2천억 원)를 받았다. 이 자금으로 비료 공장 건설에 필요한 건설 자재를 도입하는 명세 속에 비료 공장 건설과 관련이 없는 사카린 원료인 OATS를 비롯하여 당시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각종 수입품을 대량 밀수했다. 삼성은 이를 국내에 팔아 정치자금과 공장건설 자금을 마련할 심산이었다. 당시 밀수는 4배 이상이 남는 장사였다.

특히 OATS 43kg짜리 포대 2259부대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하역부들이 유출한 몇 포대 때문에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고 결국 1966 9 15일 경향신문의 폭로로 이 사실이 드러났다.

 

적발한 세관이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에 해당되는 큰 밀수사건을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1059포대의 압수와 2천만 원의 벌과금 추징만으로 사건을 흐지부지하게 하자 언론과 국민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국회는 특별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고 박정희 대통령은 9 19일 삼성밀수의 전면 재수사를 명령했다. 대검 특별수사부는 10 6일 재수사 착수 18일 만에 이병철의 둘째 아들 이창희 한국비료 업무담담 상무 등이 회사에 내자 조달을 위해 4월 중순 차관자금으로 사카린 원료인 OTSA 10t을 밀반입, 5 14일 이 회사 이일섭 총무담당 상무를 통해 이를 금북화학에 매각, 관세, 특관세 등 520여 만원을 포탈한 것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1966 3 24일 이창희는 징역 5, 이일섭은 징역 2 6개월을 비롯하여 10억 원의 벌금을 언도 받았다.

 

이보다 앞서 이병철 회장은 9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비료 공장을 완공한 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룹의 총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삼성그룹 회장은 이병철의 장남인 이맹희가 승계하였다. 하지만, 이병철이 은퇴를 선언한지 불과 2년 만에 화려하게 컴백하면서 이맹희는 둘째 이창희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당했고 후계자 자리는 셋째인 이건희한테 양도되었다.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인해 사퇴성명을 하고 있는 이병철

'

한국비료공장 준공에 즈음하여 공장을 둘러보는 이병철 회장과 장기영 장관

 

 

한편 1966 9월 22, 국회의원 김두한의 그 유명한 국회 오물 투척사건이 발생한다.

22, 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각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틀째 대정부 질문이 이어졌다. 김대중 의원에 이어 마지막 질의자로 무소속의 김두환 의원이 박스를 하나 가지고 발언대에 올랐다.

 

김두환은 "배운 게 없어서 말은 잘 할 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할 줄 모르는 행동은 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입을 열고 이어 그는 자신의 과거 투쟁경력 등을 소개한 후 밀수사건에 대해 일갈했는데, '국회의사록'에 기록된 그의 발언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두한은 네모 박스를 풀어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라고 외치면서 국무위원석으로 내용물을 던졌다. 그 속에 든 것은 다름 아닌 '똥물'이었다. 제일 가까이 앉았던 정일권 총리는 거의 온몸을 인분으로 뒤집어썼으며, 다른 장관들에게도 똥물이 튀기는 마찬가지였다. 본회의장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고, 장내에는 똥 냄새로 가득했다.


 

김두한 의원이 발언대에 오물이 든 상자를 올려놓은 채 연설을 하고 있고 정일권 총리가 이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후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은 김 의원의 징계를 요구하였고, 국회 법사위에서는 김 의원의 제명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잃게 되었고 국회의장 모욕,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그리고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하여 이맹희는 1993년 발간한 《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에서 아래와 같이 박정희와 이병철의 공모 하에 이루어진 조직적 밀수였다고 밝히고 있다.

 

1965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 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 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이맹희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사카린 밀수사건'은 자신이 지휘했다고 밝혔다. (한겨레, 1993. 6. 29)

'역사속에 오늘, 9월 > 9월 15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주택은행, 주택복권 발매 시작  (0) 2016.08.21
국내 첫 라면 삼양라면 생산  (0) 2016.08.21
인천상륙작전  (0) 2016.08.21
뉘른베르크법 공포  (0) 2016.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