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8일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 개통

산풀내음 2016. 8. 22. 21:31

18999 18,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 개통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1897 3 22일부터 공사에 들어가 1899 9 18일 개통됐다. 개통 당시 철로 길이는 노량진-제물포 간을 잇는 33.2km였다. 세계에서 처음 철도가 개통된 것은 1825년 영국 스탁턴 앤드 달링턴 철도(Stockton and Darlington Railway)였다. 그로부터 74년이 지난 1899 9 18일 우리나라에도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된 것이었다.




 

1899 9 18일 인천 제물포에서 열린 개통식 모습


경인선 개통식, 미국 부룩스 회사의 모걸형 탱크 기관차에 성조기와 일장기가 걸려 있다. 이를 통해 이 기관차의 운영과 소유는 외세였음을 알 수 있다. 경인선은 1900년 한강 철교 개통 이후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노량진역에서 한강 철교 쪽으로 가다 보면 '한국 철도 시발지비'가 있다.

 

당시 경인선은 기관차 4, 객차 6, 화차 28량으로 첫 운행을 하였다. 당시 개통된 역은 인천 - 축현 - 우각동 - 부평 - 소사 - 오류동 - 노량진의 7개 역이었다. 이 무렵 승객은 하루에 겨우 20명 안팎이었고, 차 삯은 75전으로 일반 백성에게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걸어 다녔다. 또한 화물은 여전히 한강의 배편을 많이 이용하였기 때문에 적자를 면치 못하였다.


 

당시 운행했던 열차

 

우리나라에서 철도가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열강들이 철도부설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1882년부터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정치고문이던 독일인 묄렌도르프(18481901)는 고종에게 국고가 빈약하니 철도 부설을 연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건의했다.

 

1882년 미국과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은 이후 두 나라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게 되었다. 조미통상조약에 따라 1883년 초 조선 미국공사로 푸트가 부임하자 이에 대한 답례로 고종은 젊은 개화파 정치가인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보빙사로 임명해 홍영식 등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아더 미국 대통령을 예방한 뒤 때마침 보스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구경하고 기차를 타본 이들은 귀국 후 기차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한국이 서양으로 파견한 최초의 외교사절 보빙사. 앞줄 왼쪽부터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우리탕, 뒷줄 왼쪽부터 현흥택, 미야오카,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1887 6월 주미조선공사(駐美朝鮮公使)로 임명된 박정양을 수행한 이하영이 미국체류 중 기차를 타보고 그 편리함과 신기함에 감탄한 나머지 귀국할 때 정교하게 만든 기차와 철도 모형을 가지고 와 고종에게 보여주었고, 이를 계기로 철도부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철도 바람이 불었으나 10여 년 가까이 자금과 기술부족으로 철도부설을 미루고 있는 가운데, 1892 5월 미국인 제임스 모스는 조선에서 철도사업을 하기 위해 미국에 있던 주미 참찬관 이완용과 서기관 이하영을 설득했다. 이에 이완용과 이하영은 귀국 즉시 고종에게 철도부설의 절박함을 주장하고 고종을 설득한 끝에 모스를 고문으로 초청할 것을 허가 받기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1893년 모스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모스는 철도부설권을 쉽게 따기 위해 오히려 조선정부에 왕복여비 등 손해 보상비로 은() 1만 원을 청구하는 비열한 짓을 해 한동안 말썽을 일으켰다.

 

한편 1892 8, 일본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인 철도기사 가와노 텐즈이 일행이 부산주재 총영사 무로다 요시부미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으로 변장해 서울∼부산간 철도 선로를 몰래 답사한 후 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와 도면을 작성해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 그 뒤 1894 7월 일본 외상 무츠 무네미츠는 다케우치 츠나를 우리나라에 파견해 서울∼인천간과 서울∼부산간 철도부설을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청일전쟁을 치르기 위한 군용으로 이 두 철도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이 일본의 우세로 돌아서자 일본은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일단 전쟁이 끝난 뒤 경인철도를 부설하기로 했다. 그 대신 일본군은 1895 2월 진남포와 평양 사이에 80km의 전쟁수행용 군용철도를 만들었다. 일본식 협궤 철도였다.

일본군의 우세로 일단 주전선이 북상해 평양까지 이르자 막대한 자금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부산-평양간 철도 부설 대신 선박으로 군대와 군수품을 싣고 서해로 올라와 진남포에 내린 뒤 평양으로 운송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모두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약식 군용철도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크게 쓸모가 없어져 전쟁 후 철거되고 말았다. 비록 협궤에 꼬마열차였지만 진평선은 우리나라에 놓인 첫 철도였다.


 

협궤열차 진평선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철도라 할 수 있는 경인철도 부설권은 1896년 미국인 모스가 고종 황제로부터 받게 됐다. 모스는 인천의 미국인 거상 타운센드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1897 3 22일 인천 우각리 쇠뿔고개에서 인부 350명을 모아놓고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졌다.

 

하지만 모오스는 당시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부설권을 놓친 일본은 집요하게 매수를 희망하였다. 결국 모오스는 1898 12, 170만원을 받고 부설권을 일본인들의 경인철도인수조합으로 넘기고 말았다. 일본은 1899 4 23일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속도를 높여서 9 18일에 경인철도 가영업을 시작했다.

 

일본은 인천과 노량진간의 개통에 이어 노량진과 서울역 공사를 서둘러 1900 7 8일에 전구간을 개통시켰고, 11 12일에 서대문에서 개업식을 가졌다. 경인선은 1965 9 18일 복선에 이어 1974 8 15일 전철화됐다.



 

1899 9월 인천과 노량진 역간의 경인철도가 개통한 뒤 서대문역까지의 연장 개통을 위해 현재의 서울시 용산구 서부이촌동(二村洞)과 동작구 노량진동(鷺梁津洞)을 연결하는 철교로 한강에 놓인 최초의 다리로 1897 3월에 착공하여 1900 7월에 준공되었다.


노량진-서울역 간의 기공식 모습


대한민국 철도의 역사,

http://blog.daum.net/gmania65/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