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산풀내음 2016. 8. 22. 21:37

19319 18,  만주사변 발발

 

1889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얻게 된 요동반도 할양을 시작으로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도 특히 1905년 쓰시마해전 후 결정적 우위를 점한 일본제국은 미국의 중재를 통해 1905 9 5일 이루어진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에서 남만주 와 영지의 조차권, 대한제국에 대한 배타적 지도권 등을 획득했다. 그리고 일본은 남만주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05년부터 관동군을 설치하여 주둔시켰다.

 

한편 중국 최대의 군벌 중에 하나인 장쭤린(張作霖, 1873 3월 19 ~ 1928 6월 4)의 봉군(奉軍, 봉천파)1920년 직계 군벌과 연합하여 환계 군벌을 패퇴시키고, 만주에서의 세력을 산해관 안쪽까지 확장하였다. 일본은 1 세계대전 이후, 봉천파를 원조하며 중국 동북지방을 노렸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 1887 10월 31 ~ 1975 4월 5)의 국민혁명군이 북벌운동을 개시하면서 장쭤린을 압박했고 이에 밀리자 일본은 장쭤린이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장쭤린을 제거하기로 하고, 고모토의 직속 부하로 하여금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돌아오는 장쭤린의 남만주 철도기차를 폭파하여 그를 암살(1928 6 4, 장쭤린 폭살사건)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사실상 고모토가 의도했던 일본의 만주 개입을 유발하지는 못했다.


 

좌로부터 장쭤린, 장쉐량, 장제서

 

파괴된 장쭤린의 특별열차

 

이후 관동군과 봉천파와의 협조관계는 끝나게 되었고, 장쭤린의 대권을 이어받은 아들 장쉐량(張學良, 1898 6월 4 ~ 2001 10월 15) 1929년 마침내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에 합류하게 되었다.

장쉐량은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여순·대련의 조차지 및 남만주 철도의 회수, 영사재판권 철회, 일본에 의한 철도부설권 및 탄광개발권 확장에 대한 반대, 일본인, 조선인에 대한 가옥임대료 및 소작료 인상 또는 계약갱신 거부 등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일본인의 동북 지역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또 한편 1929년 발생한 세계 경제대공황(1929~39)으로 성장일로에 있던 일본 경제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1 6나카무라 대위 사건1931 7월의 만보산 사건을 발생한다.

변장을 하고 중국 동북의 흥안령(興安嶺) 지방에서 스파이 여행 중이던 참모본부의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郎) 대위가 중국군에게 붙잡혀서 동행하던 이스키 노부타로(井杉延太郎) 예비역 상사 등과 함께 사살된 것이다. 진상은 8월이 되어서야 일본 측이 발표했는데 일본인의 반중국의식을 자극함과 동시에 침략의 명분을 축적했다.

 

그리고 1931 7 2, 지린 창춘현(長春縣) 싼싱바오(三姓堡)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족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충돌 및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이는 일본이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악화시키기 위해서 술책을 부린 것이었고 오히려 이를 알게 된 중국에서는 배일 운동이 더욱 심화되었다.


 

만보산 사건의 배경이 된 이퉁 강 관개수로.


만보산 사건 이후 파괴된 평양의 화교 거리. 1931 7

 

한편 일본 제국은 만주 침략을 위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관동군은 1931 9월 18 10 30분경 류탸오후(柳条溝)에서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 지휘하의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선로와 침목의 일부가 파괴됐을 뿐 큰 사고는 아니었다.

 

이튿날 관동군은 ‘자위(自衛)를 내세워 일제히 군사행동을 개시, 장쉐량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대영(北大營)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조선 내 일본군도 국경을 넘어 만주를 침공해 들어갔다. 만주사변이 시작된 것이다. 관동군 입장에서는 대공황으로 구미열강들의 간섭이 어려운 사정을 이용하고 장쉐량이 베이징에, 또한 봉천 군벌의 주력이 장성선 이남에 집결하고 있어 잔류 수비대가 동삼성에 분산되었던 기회를 포착한 것이었다.

 

당시 베이징에 있었던 장쉐량은 사태의 확대를 막기 위해 저항하지 말자는 난징 국민정부의 방침에 따라 저항하지 않았다. 이에 관동군은 만주 침략작전을 시작한지 5일 만에 랴오둥, 지린성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두 성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관동군이 속전속결로 펑텐ㆍ창춘(長春)에 이어 지린(吉林)성의 거의 전 지역을 점령해 들어가자 본토의 내각도 사건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당초의 방침에서 후퇴하고 추인(追認)으로 돌아섰다. 정부가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일본군은 11월에 동북 3성 전 지역을 장악하고 이듬해 3 1일 괴뢰국 만주국까지 세워가며 만주점령을 기정사실화했지만 중국은 국제연맹에 제소만 했을 뿐 적극적인 저항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후 전투를 중지하고 3 24일부터 정전협상에 나섰다. 4 29일에는 홍구(虹口)공원에서 상해 점령 및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 행사를 개최했다. 상해를 점령해 기세가 드높던 이 행사장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폭탄을 던졌다.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상해 일본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河端貞次)가 폭살되고 노무라(野村吉三), 우에다(植田謙吉) 두 중장과 무라이(村井倉松) 총영사, 시게미쓰(重光葵) 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국제연맹 1933 2월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의 철병(撤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 전쟁의 시작이며, 제2 세계 대전의 서곡이었다.




1931 9 19일 새벽 일본 관동군이 일방적으로 장쉐량 군을 공격해서 봉천성을 장악한 뒤 환호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