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일

9월 총파업에 이어 대구폭동 발생

산풀내음 2016. 8. 30. 20:44

1946 10 1,

9월 총파업에 이어 대구폭동 발생

 

1946 5월에 적발된 조선정판사 위폐(僞幣)사건을 신호탄으로 미군정이 해방일보를 폐간하고 공산당 간부들을 검거하는 등 조선공산당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자 조선공산당도 폭력에 호소하는 새로운 전술을 들고나왔다. ‘테러는 테러, 피는 피로 갚자’는 ‘신전술’이었다.

 

전평(全評ㆍ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전면에 나서 총파업을 준비하던 중 10월로 예정된 총파업이 갑자기 9월로 앞당겨졌다. 미군정 운수부가 적자 타개를 내세워 운수부 종업원을 25%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발표가 있고 난 뒤였다. 철도 노동자들의 불만에 편승하기 위해서였다.

916, 철도 노동자들이 미군정에 6개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시한부 파업을 통보했지만 미군정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923 7000명의 부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발로 924일 오전9, 전국적인 총파업이 시작됐다. 광복 후 최초의 그리고 한국노동운동사상 최대규모의 ‘9월 총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광복 이후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의 실패로 남한 내 민중들의 배고픔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특히 대구, 경북의 경우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염을 막는다며 대구를 봉쇄하자 굶주림은 특히 더 심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1 대구지역에서 노동단체들이 모여 메이데이 행사를 개최됐고 행사는 미군정에 대한 항거로 바뀌게 되었다. 이 와중에 군중들을 해산코자 공포를 발사했던 경찰이 군중의 구타로 중상을 입게 되고, 오후 1시경에는 대구역전에 동맹파업단이 집합하여 남조선 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간판을 걸게 되고, 경찰당국은 군중의 해산을 명했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군중들은 해산을 거부했고, 오후 5 30분경 역전에서 운수경찰관과 운수노조 간에 충돌이 발생하고, 이에 출동한 경찰 수명이 군중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게 되고, 군중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의 발포에 민간인이 사망하게 된다.


 

1946 10 1, 대구지역에 개최된 메이데이 행사

 

10 2, 대구경찰서, 역전, 시청 앞에서는 오전부터 항의시위가 벌어졌고 대구경찰서는 군중들에 의해 점거된다. 또한 역전에서는 경찰과 군중 사이에 사격이 시작되면서 양측에서는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상황이 악화되고 대구경찰서가 군중에 의해 접수되었다는 소문에 군중들은 대구시내 도처에서 경찰을 공격하고, 만 여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미군정은 10월 2 오후 7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질서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시위대는 대구를 벗어나 영천, 의성, 군위, 왜관 등으로 이동하며 무장투쟁을 선도했다. 아비규환이었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폭동참가자가 230만 명, 살해된 사람수가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구에서 사망한 경찰관 만 54명이고, 부상자만 2만 여명에 달했다.


 

대구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된 1946 10 2일 대구경찰서 앞의 시위대.



10 2, 시민에게 발포하는 경찰


경찰의 총격에 희생된 민간인들 시신. 10 1일과 2일 양일간 경찰 4명과 민간인 18명 이상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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