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산풀내음 2016. 8. 30. 20:52

 

194910 1,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37 7 7일 소위 ‘7.7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막을 열면서 제2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었다. 합작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당시 중국의 지도자는 장제스였으며, 중국 공산당은 소련 코민테른에 종속된 하부 정치 세력일 뿐이었다. 또한 장제스의 목표는 수많은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던 중국의 통일이었고, 홍군은 단지 그 중의 수많은 걸림돌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물론 마오쩌둥의 목표도 중국 전역에 프롤레타리아 혁명를 일으키는데 있었기에, 국공합작이 결성되었을 때의 합의와는 달리 장제스가 일본과의 전쟁에 모든 관심을 쏟는 사이 농촌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공은 합작을 통한 일제와의 전쟁이 아니라 상호간의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버마가 함락되어 중국이 봉쇄되면서 국민정부의 군사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이에 중공에 대한 통제력 또한 약화되자 중공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특히 류사오치와 천이, 덩샤오핑에 의해 재건된 신4군은 환남사변으로 국민정부군에 강력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고 도처에서 국민정부군을 공격했다.

1943 2월 장제스가 ‘중국지명운(中國之命云)’에서 "일본은 피부의 병이요, 공산군은 심장의 병이다(日本是皮肤之患,共产党是心腹之患)"이라고 한 것 역시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중국은 일본에 빼앗겼던 만주와 대만(타이완)을 되찾고 전승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높여 갔다. 그러나 오랜 전란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경제적 고통이 극심한 가운데 국민은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신해혁명 기념일쌍십절194510 10, 43일간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쌍십 협정'을 맺고 이듬해 1월에는 여러 정당이 대등한 자격으로 참가하는 정치 협상 회의를 열어 평화·민주적으로 중국을 통일해 가는 데 합의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회담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은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오른쪽).

 

그러나 양측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 한편 미국 마샬 장군의 중재를 통해 공동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이 1946 1월부터 시작되었고 어느 정도 합의가 되었지만 인준 과정에서 국민당은 합의안을 번복했다. 마침내 1946 6국민혁명군이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면서 전면적인 내전이 개시되었다.

한편 그의 군사 고문이었던 웨드마이어 장군은 국민정부의 취약성을 들어 절대 공산군을 먼저 공격해서는 안되며, 동북을 포기하고 산하이관 이남을 굳히라고 권유하였다. 또한 동북을 유엔에 의한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 이는 분명히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공산당을 선제 공격하였다.

 

국공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장제스는 모든 면에서 유리했다. 국제 사회에서 그는 오랫동안 중국 유일의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중국 전토의 3/4을 장악하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미국의 강력한 원조를 받고 있었고 430만 명의 정규군을 보유하였다.

그 중에 미국식으로 편성된 엘리트 부대는 약 30만 명 정도였으며 나머지 역시 항복한 일본군에게 넘겨받은 막대한 무기로 무장하였다. 장제스 직계의 지휘관들은 장제스에 대한 높은 충성심을 갖추고 있었고 현대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중공은 재정적으로 매우 빈약했으며 고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비밀리에 아편을 제조하여 판매하였다. 공산군은 120만 명 정도였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일본 패망 직전에 입대한 자들이었다. 병사들은 열의는 있었으나 기초적인 군사 훈련조차 받지 못했고 간부들 역시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 중화기는 고사하고 소총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펑더화이나 린바오, 류보청, 주더와 같은 공산군의 최고 지휘관들은 정규전에서 대부대를 지휘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국민당군은 주로 대도시를 점령하며 나아갔다. 그러나 1948년부터는 국민당군이 인민 해방군(공산당군의 다른 명칭)에게 밀리기 시작하여 전세가 역전되었다. 특히 1948년 말에 동북과 화북, 화중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이른바 ‘3대 전역은 결정적이었다. 국민정부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했다. 싸울 의지마저 잃은 군대는 이탈하기 시작했고 정치가, 지식인들, 관료들 역시 앞다투어 중공으로 넘어갔다. 이는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지위와 재산, 목숨을 보존 받기 위해서는 승자 쪽에 붙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침몰해 가는 거함과 명예롭게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인민 해방군은 중국 동북 지방을 점령하더니, 텐진과 베이징을 차지했다. 1949 4월에는 인민 해방군이 총공격을 하여 국민 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차지하고, 5월에는 상하이를 점령했으며, 대세를 몰아 남쪽으로 치달아 연말에는 대륙을 거의 다 휩쓸었다.

 


베이징에 입성하는 인민해방군


결국 1949 10 1, 마오 쩌둥은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군중을 향해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알렸다. 건국 선언이 있기 전인 9월 하순에 공산당 대표자가 모인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규정이 이루어졌다.

그 규정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인민 민주주의(신민주주의) 국가이고, 노동자 계급을 지도자로 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기초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또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하고 국가 주석에 마오쩌둥을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는 마오쩌둥

 

나아가 중국 인민해방군1949 10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 30일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重慶)마저 함락시켰다. 12 10장제스는 국민당 정부의 대륙 최후 거점인 청두(成都)에서 타이완(臺灣)으로 탈출했고, 12 27중국 인민해방군이 청두에 입성함으로써 중화민국은 대륙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1949 10인민해방군은 중국대륙과 타이완 섬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진먼 (金門島)을 공격하여 고령두(古寧頭) 전투(1949.10.24 - 10.26)를 벌였으나 중화민국 국군에 대패하여 타이완 과 이 섬에 대한 중화민국 정부의 지배가 굳어졌다.

 

그러면 초기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장제스가 마오쩌둥에게 패배한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첫째로 장제스 정권의 내분에 있었다. 국민정부 내에서 장제스의 권위는 매우 취약했다. 국민당은 수많은 파벌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反장제스 파였다. 군부는 크게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황푸파와 서북군벌 펑위샹의 영향을 받는 바오딩파, 광시군벌 리쭝런의 광시파로 나뉘었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기를 거부했기에 통일된 지휘권을 행사하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는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었다. 미국은 내전을 반대하면서도 막상 장제스가 내전을 결정하자 10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를 제공하고 항공기와 군함을 투입해 병력을 수송하였다. 국공내전 중에 미국이 장제스 정권에 직간접적으로 제공한 금액은 무려 60억 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이것은 장제스 정권에게는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다. 미국의 차관은 국민정부군의 군사작전을 지탱하는 생명줄이었지만 그로 인해 고위 지휘관들은 나태해지고 축재에만 열을 올렸다. 누구도 열심히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군사비와 부패한 관료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면서 중국 경제의 재건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의 관전 장교들은 국민정부군이 타락하여 중일전쟁 당시의 열의가 없다고 비판하였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장제스는 스스로 뭔가를 해쳐나가려고 노력하는 대신 더욱 미국에 매달렸다. 미국이 등을 돌리자 정권 자체가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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