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4일

투르크와 러시아의 크림전쟁 발발

산풀내음 2016. 9. 2. 22:58

1853 10 4,

투르크와 러시아의 크림전쟁 발발

 

1853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가톨릭교도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투르크와의 교섭을 통해 예루살렘의 기독교 성지 관리권을 인정받았다. 그러자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1744년 투르크와 맺은 케추크카이나르지 조약을 근거로, 투르크 영토 안에 사는 그리스 정교도들의 보호권이 러시아에 있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의 방해로 러시아의 요구는 거절당했다. 1853 7, 니콜라이 1세는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도나우 강 하구의 공국(왕보다 낮은 작위를 가진 군주가 다스리는 군주국)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공격해 점령해 버렸다.

 

 

영국은 바로 투르크를 지원하겠다고 나섰고,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투르크는 1853 10 4,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 도나우 강을 건너 러시아 군을 공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럽은 1856년까지 또다시 크림 전쟁(대부분의 전투가 흑해에 있는 크림 반도 주변에서 일어나 붙여진 이름)이라 부르는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러시아의 흑해 함대가 투르크 쪽 흑해 해안에 있는 시노페 앞바다에서 투르크 함대를 격파하자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1854 1 3일 투르크의 수송 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흑해로 들어왔다.

3 28일 영국과 프랑스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만족시켜 참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에서 철수했지만 1854 8월 오스트리아가 이곳을 점령했다. 1854 9월 연합군이 흑해의 북쪽 해안에 있는 러시아의 크림 반도에 상륙해 1년에 걸친 세바스토폴 포위가 시작되었다.

 

1855 1 26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도 전쟁에 가담해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프랑스군이 러시아의 주요거점인 말라호프를 공격한 지 3일이 지난 1855 9 11, 러시아군은 요새를 폭파하고 함선들을 침몰시킨 뒤 마침내 세바스토폴에서 철수했다. 전쟁의 제2단계는 카프카스와 발트 해에서 전개되었다.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에 가담하겠다고 위협하자 러시아는 1856 2 1일 예비 강화조약을 받아들였다. 파리 강화회의는 2 25일부터 3 30일에 걸쳐 최종 타결안을 내놓았다. 크림 전쟁에서는 교전국 모두가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않은 데다 지휘 체계가 형편없었다.

또한 질병으로 양측을 합해 약 25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병력이 죽었다. 크림 전쟁은 동유럽에서의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해결하지 못했다. 새로 러시아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2(1855 3월 니콜라이 1세를 계승함)는 이 전쟁을 통해 러시아가 유럽 강국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후진성을 탈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전쟁의 또 다른 결과는 오스트리아가 영국과 프랑스 편에 가담함으로써 중부 유럽 문제에 대해 러시아의 지지를 잃은 점이다.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의지하게 되었으나, 이들의 지원을 받지 못해 1859, 1866년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오스트리아에 승리한 이탈리아와 독일은 각각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크림전쟁 당시 Shadforth 대령과 그가 이끄는 57연대



영국군인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

 

치열한 전투와 전염병이 겹친 크림 전쟁으로 인해 양측은 모두 약 25만 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손실을 낳게 되었다. 이때 영국《타임즈》의 윌리엄 하워드 러셀 기자(세계 최초의 종군 기자)는 전쟁 소식을 본국으로 보내, 고통스러운 참상을 그대로 세상에 알렸다.

 

이 소식을 접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은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고통 받는 군인들을 위해 간호사들을 인솔하고 전쟁터로 향했다. 당시 나이팅게일은 런던 숙녀 병원 간호 부장이었다. 그녀는 전쟁터에 도착하자마자 야전 병원(전선 후방에 세워진 임시 병원. 크림 전쟁 당시 세계 최초로 세워짐)을 세워, 국적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병사들을 치료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백의의 천사’라고 불렀고, 일부에서는 크림 전쟁을 ‘천사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뒤 앙리 뒤낭이 전쟁 부상자 구호를 위한 국제기구의 창설을 주장하였고, 유럽의 각국이 적극 협조하여 1863년 국제 적십자가 창설되었다. 1864년에는 국적이나 정치, 종교, 사상에 구애 받지 않는 구호 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적십자 조약)이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