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4일

김영삼의원 제명

산풀내음 2016. 9. 2. 23:16

197910 4,

국회, 김영삼 의원 제명

 

1970년대 초 수출순위 15위로 국내 최대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은 1970년대 중반부터 수출둔화와 업주의 자금유용, 무리한 기업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든데다 1975년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1979 3월 폐업을 공고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4 13일부터 장기농성에 돌입했고, 8 9일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감행했다.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YH무역의 여공들과 면담한 후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안심시켰고, 이후 경찰들이 신민당 당사 주변에서 감시활동을 벌이자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이들에게 발길질을 하고 따귀를 치며 경고를 하였다.

 

결국 정부당국은 치안상의 이유를 들어 8 11일 새벽 2시 경찰 1000여 명을 신민당사에 투입, 농성 중이던 근로자를 강제 해산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근로자 1명이 추락, 사망하였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김영삼 총재는 상도동 자택으로 강제로 끌려 나갔다.


 

: 신민당사에서 끌려 나오는 YH여성 노동자. : 사복경찰에 끌려 나오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눈엣가시 같던 김영삼을 벼르고 있던 그리고 1978년부터 김대중을 가택 연금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기화로 김영삼 마저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중 김영삼 총재가 1979 9 16일자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 팔레비왕정 독재체제를 무너뜨렸던 사태를 언급하며, "이는 (팔레비왕정을 지지했던) 테헤란주재 미국대사관의 실책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미국대사관이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김영삼 총재의 기자회견을 두고 '헌정을 부정하고 사대주의 발언을 했다'고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고, 9 22일 소속 국회의원 160명 전원의 이름으로 국회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징계동의안'을 제출했다.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이날 통합 당무회의를 열어 징계 종류는 '제명'으로, 징계 시기는 정기국회 회기 중에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다.

 

D-Day 10 4일로 결정되었고 신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을 점거한 채 의사진행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러나 당시 백두진 국회의장은 구두로 법사위에 징계동의안을 회부하였고 이후 3분 후에 소집된 법사위에서 야당 의원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40초 만에 전격으로 날치기 통과시켰다.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지키고 있자 장소를 바꾸기로 결정한 후 야당의원들을 묶어두기 위해 국회의장이 국회법 제140조에 따라 내무부에 연락하여 경찰권을 발동하고 국회법 141조에 따라 경찰 파견을 요청하였다.

 

여당 의원들은 평소 여당의원 의총 장소로 사용돼 온 의사당 내 146호실로 본회의장을 변경하였고, 이날 오후 4 7분 여당은 사복경찰 300여 명이 146호 진입로를 봉쇄하여 야당의원들의 진입을 차단시킨 후 여당 의원들은 비공개회의를 열어 표결을 강행하였으며, 4 20분 백두진 의장은 "출석의원 159명 중 159표로 가결되었다"고 김영삼 의원의 제명을 선포했다.

이로써 의정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현직 국회의원을 제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54년 만 25세의 나이로 자유당 후보로 출마,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에 이어 두 번째 기록(?)이다. 이후 9선 이라는 최다선 기록도 박준규, 김종필과 함께 세운다.


 

1979 10 4일 백두진 국회의장은 여당 의원만 참석한 가운데 여의도 국회의사당 146호실에서 본회의를 열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안을 가결, 선포했다.

 



 

제명 처리 후 자신의 자리에서 관련 기사를 보고 있는 김영삼

 

사태 후 신민당 소속 의원 전원은 무기한 등원거부 결정을 내렸고, 당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민주주의는 조종(弔鐘)을 울렸다"며 전국 각 지구당에 당기(黨旗)를 조기(弔旗) 형태로 달 것을 하달했고, 김영삼 총재는 당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한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도 "김 총재 제명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9일 뒤인 10 13일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의원들은 집단사퇴서를 제출하면서 박 정권과 정면으로 맞섰다. 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을 거론하면서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마침내 사태는 정치권 담장을 넘어 대학가로 확산됐고 시작은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이었다. 10 15일 부산대 학생들을 시작으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결국 10 26일 박정희 서거로까지 이어졌다.

 

국회의원 제명 안이 국회 본회의까지 올라간 경우는 김 전 대통령을 포함해 모두 4차례지만 YS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건은 모두 의결까지 가지 않고 폐기됐다.

가장 먼저 상정된 제명 안은 3대 국회였던 1957 11 14일 무소속(울산갑) 김수선 의원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건은 3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인 1958 5 29일까지 처리되지 않아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다음은 1966 9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던졌던 김두한 의원이다. 그는 본회의에서 정부를 상대로 삼성 측의 사카린 밀수사건을 추궁하던 중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에게 오물을 던졌다. 화가 난 이효상 국회의장이 김 의원 징계를 요구했고, 24일 제명 안이 국회 법사위를 통과해 본회의에 올라왔다. 그러나 김 의원이 의원직 사직서를 내 제명 안은 자동 폐기됐다.

 

1975 10 8일 신민당 소속 김옥선 의원이 대정부질의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딕테이터(독재자) '이라고 지칭했다가 제명 위기를 맞았다. 이 또한 김 의원이 먼저 사퇴서를 내 제명 안은 처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