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1일

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며 프랑스인 살해, 알제리아 독립전쟁의 시작

산풀내음 2016. 10. 11. 20:44

195411 1,

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며 프랑스인 살해, 알제리아 독립전쟁의 시작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았는데, 바로 그 해에 파리에선 부르주아 계급이 절대왕정으로부터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쟁취한 ‘7월 혁명이 일어났다. 안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시민혁명을 하는 동안, 밖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를 침탈하는 제국주의 행태를 보인 셈이다.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통치와 저항세력 탄압은 다른 어느 제국주의 국가 못지 않게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했던 1945 58, 프랑스가 나치에서 벗어났다고 프랑스계 백인들은 잔치를 벌이며 환호했지만, 반대로 알제리 국민들은 독립을 주장하는 비무장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군은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를 하였고 당시 알제리 국기를 들고 있던 12살 소년 사르 알 부지드가 머리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 소년 죽음에 알제리 사람들이 격분하면서 사태는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인도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 프랑스 군은 육군을 통한 학살에 더하여 비행기와 순양함 등을 동원에 알제리 주민들의 마을에 폭격하기까지 이른다.

 

결국 45,000명에 달하는 무고한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학살당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알제리 독립전쟁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국가를 침입한 나치에 대하여는 비난하면서 자신보다 약한 국가에 대하여는 나치보다 더 잔학한 만행을 저지르는 민족이 바로 프랑스인들인 것이다. 이는 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만 아니라 인도차이나에서도 마찬가지로 자행되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의 만행을 잠깐 소개하면, 1946 11, 프랑스는 옛 식민지 베트남을 재차 침공했다. 1949 6, 프랑스는 해외에 망명 중인 응우옌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를 주석으로 한 친프랑스 정부를 세웠다. 전쟁이 장기화됐고 전황은 점차 프랑스군에 불리해졌다. 1953 11,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나바르는 라오스로 연결된 월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1 6,000명의 외인부대를 동원해 라오스 국경의 디엔비엔푸를 점령하고 요새를 건설했다.

 

월맹군이 이끄는 보구엔지압(武元甲) 4만 명의 병력으로 터널을 뚫고 요새 벽까지 접근했으며 대포를 분해해서 등에 진 채 인해전술로 산을 넘었다. 1954 3 13, 월맹군이 디엔비엔푸에 공격을 개시했다. 결국 1954 5 7일 인도차이나전쟁의 종결을 토의하는 제네바회담 도중 인도차이나에 있는 프랑스군의 거점, 디엔비엔푸가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함락됐다.


월맹군에 포로가 된 프랑스 놈들. 내가 침략당하는 것을 부당하고 내가 침략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이상한 뇌 구조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 국민들

 

1954 11 1일 알제리의 전 토 30여 곳에서 창고 방화, 농업협동조합 폭격, 프랑스교사 살해 등의 사건이 발생해 프랑스인 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은 각각의 사건들로 본다면 단순한 데모행위에 불과하지만, 종합해 보면 1954년 결성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the 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의 지도에 의한 결과였다. 1830년이래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온 알제리의 독립전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폭력에 대해 경고 조치에 그치지 않고 즉시 300명의 중무장한 경비대를 마르세이유로부터 알제리로 파병했다. 또한 프랑스 수상 맹드는 3개 대대의 낙하산병의 투입을 공식 발표했다. 모로코와 튀니지 보호령에서도 프랑스에 대한 새로운 폭력이 보도되자, 유목민들도 프랑스 공격에 가담했다.

 

탄압이 강해질수록 투쟁도 강화되었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FLN 1958년 카이로에서 알제리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아랍제국과 사회주의국가의 지원을 얻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958 2월에 수립된 드골 정부는 병력 증강과 함께 정치적 교섭도 시작하였다. 1960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비밀교섭을 벌인 결과 1962 3월 에비앙 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후 7 1일에 행한 국민투표에 의해 알제리의 독립이 선포되었고 9 26일 비로소 공식적인 정부가 수립되었다.

 

결과적으로 NATO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는 80만의 병력과 5조 프랑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하여 철저하고 잔인한 진압작전을 벌인 결과 알제리 국민 100만을 죽였고 70만을 투옥시켰다. 프랑스군도 12,000여 명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알제리 주민들을 체포하는 프랑스군

French forces killed Algerian rebels, December 1954

고문과 협박을 당하고 있는 알제리인

알제리 여성을 발가벗긴 후 사진 촬영 중인 프랑스군인, 일본인들이 난징대학살 등에서 행한 작태들과 다를 바가 없다.

프랑스는 독일과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일본과 독일보다 더 잔인한 프랑스 넘들

 

마지막으로 알제리에서 고문 기술자로 활약한 폴 오사르스(Paul Aussaresses)의 행적을 살펴보면 당시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알제리 주민들을 탄압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폴 오사르스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레지스탕스였고,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식민지 전쟁에 종군했다. 오사르스는 1955년 정보장교로 알제리로 파견되었다. 2년 후, 그는 알제리 전쟁을 지휘한 자크 마쉬(Jacques Massu) 장군을 보좌했다. 오사르스는 FLN을 상대로 체계적인 고문 체계를 구축했고, 그가 체포한 용의자들을 수용하기에는 알제리의 프랑스 감옥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즉결 처분을 했다.

 

그는 2001년의 자서전에, "전날 밤에 심문을 했던 포로들이 다음 날 아침에 살아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라고 적었다. "포로들은 자백하거나 아니면 일반적으로 무력화되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알제리에서 고문이 광범위했고, 프랑스 정부의 고위층도 고문을 추천하지는 않았지만 용인했다고 주장했다. 이 정부 고위층 인사들 중에는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미래의 사회주의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자신도 알제리 근무 경험이 있었는데, 시라크는 오사르스의 자서전을 읽고 공포를 느꼈다고 했으며, 오사르스에 대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취소했다. 파리 검찰은 오사르스와 플롱 출판사의 두 편집인을 전쟁범죄 연루 혐의로 기소했다. 3명 모두 벌금형을 받았고, 오사르스는 군복을 입을 권리를 박탈당했다.

 

알제리 독립 이후, 오사르스는 해외에서 고문기술을 전수하면서 살았다. 1960년 그는 미국 노스 캐롤리나의 포트 바르그로 가서, 알제리 전투와 그의 고문술을 강의했다. 오사르스의 고문술은 CIA요원 로버트 코머가 불사조 작전(Phoenix Program)이라 부른 것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 불사조 작전은 베트남의 베트콩을 대상으로 전개된 심문, 고문, 즉결 처분을 일컫는 것이었고, 이 작전 결과 대략 2만 명이 죽었다.

 

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산 Paul Aussaresses 2013년 아무런 뉘우침도 없이 95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는 백내장 수술 중 왼쪽 눈을 잃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