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0일

제1회 노벨상 시상식

산풀내음 2016. 11. 2. 17:36

1901 12 10,

1회 노벨상 시상식

 

Alfred Nobel, The founder of the Nobel Prize

 

노벨상의 역사는 20세기 역사의 축소판이다.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20세기 세계 정치와 과학과 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들이 망라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벨상의 첫 걸음마는 지금처럼 화려하지도 명예롭지도 못했다.

1회 노벨상 시상식은 20세기의 여명이 밝아오던 1901 12 10일 오후 430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3150만 스웨덴 크로네( 920만 달러)라는, 당시로선 엄청난 거액을 종자돈으로 내놓은 알프레드 노벨의 5주기 날이다. 수상자는 5개 부문 6. X선 발견으로 물리학상을 수상한 뢴트겐,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적십자의 아버지’ 장 앙리 뒤낭의 이름이 낯익다.

 

뢴트겐()와 장 앙리 뒤낭()

 

그러나 막상 시상식은 크고 작은 말썽으로 뒤숭숭했다. 국왕 오스카르 2세가 요즘 말로 ‘외화 낭비’가 아깝다는 이유로 시상식에 불참해 잔치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었다. 시상식장에 하객이 없어서 종업원, 요리사까지 드레스를 입고 자리를 메워야 했다. 게다가 문학상에서는 노벨이 생전에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장 유력한 후보 에밀 졸라가 제외되고, 다른 프랑스 작가 쉴리 프뤼돔이 뽑혀 공정성 논란마저 빚어졌다. 스웨덴 작가들은 또 “왜 톨스토이에게 상을 주지 않느냐”고 들고 일어났다. 메달도 제작자가 납품날짜를 못 맞추는 바람에 임시메달을 수여하는 촌극이 연출됐다.

 

노벨상(Nobel Prize)다이너마이트발명가스웨덴알프레드 노벨1895 작성한 유언에 따라 매년 인류의 문명 발달에 학문적으로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1901부터 그의 유언에 따라 5개 분야 즉, 노벨 물리학상, 노벨 화학상, 노벨 생리학·의학상, 노벨 문학상,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다른 상들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수여되는 반면, 노벨 평화상은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수여된다. 각 상은 모두 그 분야에서 매우 권위 있게 여겨진다.

 

 

다이너마이트가 군사적으로 이용되는 걸 싫어했던 노벨은 후에 유언으로 유산의 94%를 기부, 노벨상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 때 친척들(반평생 넘게 독신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기에 노벨의 직손은 없었다)이 어마어마한 알프레드 노벨의 재산을 대부분 기부하려 하자 죽기살기로 반대하며 서로 먹으려고 발악했다. 게다가 노벨은 유언장에서 국적에 상관없이 이 상을 줄 것을 당부했는데, 이것 때문에 세기말의 국수주의에 휩싸여있던 스웨덴 내 여론과 스웨덴 국왕까지도 노벨을 비난했다고 한다. 게다가 평화상 수상을 당시 스웨덴 식민지인 노르웨이에 넘겼으니 더더욱 그럴밖에 없었다.

 

유언 집행인 랑나르 솔만(Ragnar Sohlman, 1870~1948)의 결단으로 노벨의 재산은 안전한 유가증권으로 남게 되었고, 지금의 노벨상의 위상을 봤을 때 참 훈훈하게 탄생했을 것 같은 상이지만 실제로는 참 우여곡절 끝에 탄생된 상이다. 솔만은 상을 제정하며 가진 인터뷰에서욕을 그리도 많이 먹어 보니 참 재미있더군요라며 노벨의 친척들이 벌인 온갖 방해공작이나 욕설, 명예훼손을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Ragnar Sohlman

 

1968, 스웨덴 중앙은행은 흔히 노벨 경제학상 이라고 불리는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을 만들었다. 이 상은 1969에 처음 수여되었고 수상자 발표와 시상은 다른 노벨상과 같이 행해진다.

스웨덴 왕립 과학원노벨 물리학상노벨 학상,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의 수상자를 결정한다. 카로린스카 의과대학교 노벨총회에서 노벨 생리학·의학상의 수상자를 결정한다.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여한다. 다른 상들과 달리 노벨 평화상은 스웨덴의 기구가 아닌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에서 수여한다.

 

노벨상 수상자는 으로된 메달과 표창장, 그리고 노벨 재단의 당해 수익금에 따라 달라지는 상금을 받는다. 2011년 상금은 스웨덴 크로나 1천만kr( 145$)정도였다. 4명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공동 수상되지 않는다.

 

 

노벨상은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는 수여되지 않지만, 수상자로 정해진 뒤 상을 받기 전에 사망한 사람은 그대로 수상자로 유지된다. 그래서 비폭력주의로 유명한 간디도 유력한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지만 노벨상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을 깨고 죽은 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있다. 바로 캐나다의 랄프 스타인먼 교수다. 스타인먼 교수는 노벨상 발표 3일 전 2011년에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수상자 결정 과정에서는 사망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수상은 유효하다”며 수상을 확정했다.

 

2011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중 한명인 미국 록펠러대 랄프 스타인먼 교수. 노벨상 수상자 발표 3일전에 췌장암으로 사망해 세계를 안타깝게 했다.

 

노벨상은 한 번에 상을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만, 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상의 수는 제한이 없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는 2회 이상 받은 사람과 단체가 있다. 마리 퀴리, 라이너스 폴링, 존 바딘, 프레데릭 생어가 그 주인공이다. 특히 라이너스 폴링은 핵실험 반대 운동을 벌여 화학상와 평화상을 각각 수상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노벨상을 2회 수상한 과학자들. 왼쪽부터 마리 퀴리, 라이너스 폴링, 존 바딘, 프레데릭 생어다.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다. 바로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1964, 노벨 문학상)와 레둑토(팜딘카이, 1973, 노벨평화상)이다.

사르트르는 노벨상의 서양 편중, 작가의 독립성 침해, 문학의 제도권 편입 등을 반대하기 때문에 이미 다른 모든 공적 수상을 거부하고 있었고, 노벨상 역시 그의 신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레득토 당시 베트남 총리는 베트남 전쟁 종결과 파리 평화 협정을 이끈 공로로 미국의 키신저와 함께 수상자로 선정 됐는데, ‘조국 베트남에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평화상 수상을 거부했다. 레득토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에 대하여는 비판 또한 많았다.

 

장 폴 샤르트르()와 레득토(, 레득토와 키신져)

 

그 외에도 정권의 압력 하에 수상자로 선정되고도 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 무려 7명이나 된다.

1937년 아돌프 히틀러는 1935년 당시 독일의 정치범이었던 반나치 저술가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평화상 수여한 데 격분해 향후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바 있다. 이에 따라 리하르트 쿤(1938년 화학상)과 아돌프 부테난트(1939년 화학상), 게르하르트 도마크(1939년 생리·의학상)는 강제로 수상을 거부하였다.

가장 최근인 2010년에도 중국 인권 운동가 류샤오보가 중국 정부의 억류에 평화상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2009년에 징역 11년형을 받고 수감 중에 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950년에 닥터 지바고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러시아 혁명을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하여 소련 정부와 작가 동맹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면서 수상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노벨상 주최측에서는 그의 거부를 거부가 아닌 보류로 남겨두었고, 그의 사후 소련에서 닥터 지바고가 출판되고 공적으로 허락받자 그의 아들이 노벨 문학상을 대리수상하였다.

 

노벨상 수상자 자격 요건에 나이 제한은 없다.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17세의 나이로 2014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유사프자이는 아동 억압과 교육권 쟁취를 위해 국내외에서 투쟁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물론 나이가 많다고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되지도 않는다. 미국의 레오니드 후르비츠는 90세 고령의 나이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독재자이자 유대인 학살의 장본인인 히틀러는 1939년 노벨 평화상 후보자에 올랐다. 스웨덴 국회의원 E G C 브란트는 히틀러를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추천했다. 이후 브란트는 “당시 스웨덴의 정치적 논의를 비판하고자 추천했다”며 진정으로 히틀러의 수상을 바란 것은 아니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