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0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산풀내음 2016. 11. 2. 17:56

1990 12 10,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전세계 언론들이 예상했던 그대로 1990년 노벨평화상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1931 - )에게 돌아갔다.

노르웨이의 노벨평화상 위원회가 밝힌 수상자 선정 이유도 짤막했다.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변화와 평화운동에서 고르바초프가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고르바초프는 전 공산권 세계를 상대로 무혈 민주혁명을 이끌면서 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서방세계에는 ‘고르비(고르바초프 애칭) 마니아’를 형성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지난 1985년 집권 이후 고르바초프는 동서냉전 종식의 실질적인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으며 소-, -, -, -서유럽의 관계 개선에서 발휘된 그의 외교는 금세기 후반부의 국제질서에 새로운 판도 변화를 몰고 왔다.

고르바초프는 국내적으로도 소련 공산당의 일당독재에 종지부를 찍도록 유도함으로써 볼셰비키 혁명 70년 사상 최대의 정치변혁을 주도했으며, 글라스노스트(공개)의 확대실천으로 서방의 지원을 유인하면서 공산통제경제를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이행시키기 위한 돌파구를 열었다.

 

고르바초프는 모두 8차례에 걸쳐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진행하면서, 지난 1987 12월 양국간 중거리핵전력 폐기조약 체결, 소련군 50만 감군, 재래식무기 50% 감축협상 등 전례 없는 군축무드에 앞장서 왔다.

 

 

1989년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 철수도 그가 내린 결정이었으며, 1990 10월에 완수된 독일 통일도 그가 동유럽의 평화혁명과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와해를 허용치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추정을 할 수도 있다. 동구가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파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또 한국 및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국교를 재개함으로써 소련에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의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해 보였다. 고르바초프는 이라크에 대해 유엔에서 미국과 협조, 지역분쟁에 대한 강대국간의 협조유형을 만들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그러나 당초 고르바초프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 논란이나 반대의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두 공화국의 민족 분규를 유혈진압한 점, 발트3국의 탈소 독립운동에 강경한 반대입장을 고수해온 점 등이 거론됐다. 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통령제를 도입하여 그 권좌에 오른 뒤 또다시 정치-경제적 비상대권을 장악함으로써 ‘신() 차르정치’를 펴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경제체제의 전환과정에서 확대되고 있는 식량 및 소비재 품귀현상과 이로 말미암은 소련국민의 고통과 정치불안 등을 감안한다면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기까지는 좀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고르바초프의 국제적 역할에 크게 주목했다고 밝히고 소련의 국내사정은 단지 일과성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초강대국 지도자로서는 미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수상(1906) 이후 처음, 그리고 공산권 지도자로서는 사상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