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0일

테레사 수녀 노벨평화상 수상

산풀내음 2016. 11. 2. 17:53

1979 12 10,

테레사 수녀 노벨평화상 수상

 

 

‘빈자들의 성자’ 마더 테레사 수녀가 1979 12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테레사는 일체의 축하행사를 거부하며 상금 192천달러 전부를 나환자 구호소 건립기금으로 내놓았다. 상을 받을 때도 테레사의 이름이 아닌 ‘사랑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아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1910년 구 유고연방 스코페(현재의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인을 부모로 태어난 테레사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7세 되던 해 아버지의 죽음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면서 가톨릭에 귀의했다. 18세 때 아일랜드의 로레타 수녀원, 이듬해 인도 다르질링 수녀원으로 들어가 아그네스 수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1946 9 10일 캘커타의 한 열차 속에서 ‘가난한 자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수녀원을 떠났다.

 

이어 아그네스는 테레사로 개명하고 인도 시민권을 얻은 뒤 캘커타 빈민가로 들어갔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그녀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쳤고 신도들은 그녀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1950년 마침내 그녀의 ‘무한사랑’ 이 담겨있는 ‘사랑의 선교회’가 섰고, 그녀는 199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가난한 자들에 헌신하며 일생을 보냈다.

 

2007 8 오랫동안 하느님을 겪으려 해도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며 고통을 호소한 테레사 수녀의 편지가 공개되었다. 테레사 수녀의 10주기를 기념하여 발간된 책 속, 테레사 수녀가 고해 신부에게 보낸 40여 통의 편지에서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기도하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며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호소하였다는 것이다.

평온하고 강한 신앙을 지닌 듯 했던 외면과 다르게 마음 속으로는 무려 50년 동안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고통스러워 했다는 사실이 비신자와 종교인들에게 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고 AP통신2007 8월 25 보도했다.

 




 

사망 후 시복 절차를 밟으면서 대두된 문제이나 살아 생전에도 몇 가지 이유로 비난 받았다. 이는 그녀의 문제라기 보단 수도자 혹은 가톨릭 신자로서 취하게 되는 근본적인 입장, 또는 반종교적인 시선을 가진 이들이 주장하는 것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의혹을 던져주는 몇몇 사건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극렬 반종교/반신론주의자인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Eric Hitchens, 1949-2011)는 테레사 수녀가 활동하고 있던 80년대에 <자비를 팔다>라는 책을 통해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그는 어려서 기독교 종교 학교를 다니면서 신앙 교육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비롯한 신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종교를 반대하는 이유로 로마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독선과 불관용, 기타 아시아권 국가들의 종교에서도 나타나는 불관용과 교조주의를 그 이유로 들었다.

 

히친스가 제기한 여러 의문 중에 하나가 의료기관 운영에 대한 것이다.

'자비의 집' 봉사활동을 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는 자비의 집을 현대적인 의료시설로 바꾸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단지 죽어가는 이들을 방치하는 수준의 원시적인 시설관리만을 했다고 한다. 현대의 노인요양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시대도 시대이거니와 그 당시 기준으로도 열악한 시설이었다.

즉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수용소 수준. 일부 증언에 따르면 주사바늘 여러 개를 끓는 물도 아니고 찬물 아래 비벼 씻는 것으로 소독을 마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진통제 같은 기본적인 약들도 구비가 어려워 꼭 필요할 때에만 주곤 했다고 한다. 또한 적절한 처방만 하면 살 수 있을 어린아이 등을 똑같이 빈약한 치료만으로 죽게 만든 점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녀가 받았을 기부금의 액수를 생각해보면, 빈민 모두를 최상의 시설과 인력으로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쳐도, 기자재가 충분히 갖춰진 시설에서 치료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세계로부터 흘러오는 막대한 지원금 내역은 공개되지 않는 데 반해, 실제로 현지에 지어지는 의료 기관이 극도로 빈약하다는 사실로 공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시설을 그냥 이곳 저곳 늘리는 데에만 집중한 면모도 천주교의 선교에 치중한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에 비해 본인이 병에 걸렸을 때는 인도 내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요양시설에서 진료를 받았다.

 

또 다른 하나는 독재자 및 금융 사기자를 옹호한 것이다.

아이티독재자들과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은 일이나, 탐욕스러운 영부인을 향해 '빈민들과 누구보다도 가까운 분'이라는 찬사를 하는 등 상당히 의아스런 행보를 보인다.

그녀에게 거액의 기부금을 맡겨 가난한 이들을 돕도록 한 찰스 키팅이 법정에 서자, 그녀는 찰스 키팅이 보여준 사랑을 언급하면서 예수처럼 키팅의 잘못을 용서하길 청하는 편지를 보내 탄원했다. 담당 검사는 이에 대해서키팅은 가난한 서민들의 돈 또한 가리지 않고 빼앗았으며, 수녀에게 보낸 기부금에는 그런 서민들의 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도 이 돈이 제 주인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제게 연락 주신다면 키팅에게가 아니라 사기 당한 이들에게 돈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주선을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답신했다. 이 편지에 대한 테레사 수녀의 답변은 오지 않았다.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François Duvalier) 부인(Michele Duvalier)과 두 손을 맞잡은 테레사. 이에 대해 오로지 기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