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1일

1969년 KAL 여객기 피납

산풀내음 2016. 11. 3. 22:27

1969 12 11,

KAL 여객기 피납

 

대한항공 YS-11 여객기가 1969 12 11일 북한에 의해 공중 피랍됐다.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51명을 태운 YS-11 쌍발여객기는 이날 낮 12 25분 강릉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돼 오후 1 18분 원산 근처 선덕비행장에 착륙했다. 1958 2 16 KNA 소속 `창랑호` 납치에 이어 두 번째로 발생한 항공기 납치 사건이었다.

 

 

북한은 이 사건을 정치적 흥정대상으로 삼으려다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1970 2 5일 납북 민간인들을 송환키로 약속했으나 송환 당일 약속을 뒤엎고 승무원 4명과 승객 7(납치자인 고정간첩 조창희 제외)은 송환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결국 대한민국의 지리한 송환 협상에도 불구하고 2월 14 판문점을 통해서 11명을 제외한 39명을 송환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무회의 의결을 통하여, '탑승객에 대한 검문검색 강화', '비행장 직원에게 사법권 부여', '민간기 승무원들에게 무기 휴대 허용', '승객의 익명 및 타인 명의의 사용 금지' 등의 한층 강화된 항공기 보안 대책을 수립하였다. 2001 2에는 송환되지 못한 승무원 중 한 명이었던 성경희가 제3이산가족 방북단으로 평양을 방문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기도 하였다.

 

귀환한 승객 일부는 15일 오후 3시부터 중앙정보부 강당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가졌고, 이들의 증언으로 납북경위가 상세히 밝혀졌다. 이들의 회견 결과 KAL기 납북 사건은 고정 간첩 조창희의 단독 범행으로 밝혀졌다. 승객으로 가장한 고정간첩 조창희가 이륙 후 기장실로 들어가 권총으로 기장 유병하씨 등을 협박했던 것. 또 이들은 피랍 후 함흥을 거쳐 평양으로 이송된 뒤 집단별, 개인별로 수용되어 북한측으로부터 정치 세뇌를 받았는데, 이에 비협조적인 승객들은 전기 고문이나 약물 고문을 받았다고 했다.

 

황인철 '1969 KAL기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와 인지연

황 대표는 지난 2010년 유엔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 비자발적 실종 실무그룹(WGEID)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실종그룹은 북한에 답변을 요청했다. 북한은 이에 대해 올해 5 9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일반적인 답변만을 보내왔다.

황 대표는 서울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의 가족들은 단 한 번도 본인의 자유의사를 밝혀 본적이 전혀 없다" "중립국인 제3국에서 안전과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보장될 수 있는 조건하에서 '납치를 당한 것'인지 '자의에 의하여 북한에 머무는 것'인지 자유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납북 전 KAL 승무원 성경희씨 모친 상봉

 

엄마!”

“…너 내 딸 맞아?”

엄마….”

3차 이산가족 방북단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후덕(77·서울 노원구)씨가 1969 12 11일 대한항공 여객기 승무원으로 근무하다 납북된 딸 성경희(55)씨를 32년 만에 만났다. 납북 이산가족 간 상봉은 2000 12 ‘2차 이산가족 상봉때 김삼례(74) 할머니가 1987년 납북된 동진호 선원인 아들 강희근(50)씨를 13년 만에 만난 데 이어 두 번째다.

 

2001 226일 오후 430분쯤 평양 고려호텔 이산가족 상봉장.

어머니는 몇 걸음씩 다가오는 딸을 쳐다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딸이 낮은 목소리로엄마를 계속 부르자 결국 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울을 떠나오기 전 남쪽에 있는 자식들과딸을 만나도 울지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했건만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한참을 얼싸안고 울던 딸이 어머니에게 큰절을 했다. 이씨는 딸의 얼굴을 매만지며 얼굴을 비볐다.

 

엄마, 딸이야.…이쪽은 아들이고.”

성씨가 어머니에게 외손녀(26)와 외손자(24)를 소개했다. 외국유학을 다녀왔다는 외손녀와 인민군 복장의 외손자가 이씨 품에 안겨 함께 울었다. 옆에 있던 사위 임영일(58, 김일성종합대 교수)어머니, 맏사위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이씨는 상봉시간 내내 딸과 외손녀 손을 놓지 않았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손자가 우황청심환 2개를 꺼내 어머니와 외할머니께 드렸다. 이씨와 딸이 테이블에 앉아 얘기 나누는 동안 손녀는 할머니께 음료수를 드렸고 손자는 할머니 뒤에서 어깨를 열심히 주물렀다. “, 이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 전에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줄 알았는데 아니야. 딸도 만나고 손자 손녀도 만나고…. 3 15일 시작한다는 서신교환 대상에도 뽑혔어. 이젠 됐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어.”

 

서신교환 대상자로 확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씨는 행여 상봉을 못 할까봐서신교환 빼줘요. 나 편지 안하고 딸 만나고 올게요라고 통일부에 전화까지 했다고 했다.

이젠 여한이 없어. 딸도 보고. 이번에 찍은 사진에다 편지까지 써서 보내면 더 이상 뭘 바라겠어.” 이씨는 27일 개별상봉에서 조촐한 생일잔치를 열 생각이다. 음력 2 12일은 자신의 77회 생일. 딸과 함께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라고 생각해 서울에서 케이크까지 준비해왔다.

 

남측상봉단 이후덕씨가 2001 2 26일 평양고려호텔에서 열린 제3차 남북이산가족방문단 단체 상봉에서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KAL기 피납 당시 승무원이었던 딸 성경희씨를 32년 만에 만나고 있는 장면 (윗 사진). 승무원 당시 성경희씨(아래 좌)와 상봉 당시 성경희씨(아래 우)

 

성경희는 이화여대 졸업 후 대한항공에 입사한 지 1 4개월 만에 납북된 신참 스튜디어스였다. 함흥이 원적지인 성씨는 납북 당시 북한에 조부모 등 친척이 거주하고 있던 월남가족이었다. 어머니 이씨가 48 4월 젖먹이 성씨를 업고 먼저 월남한 남편을 따라 38선을 넘었던 것. 전매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성씨의 아버지는 딸의 납치에 충격을 받고 미친듯이 송환활동을 하다 지난 1979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동독·미국 등의 적십자사에 생사를 알 수 있겠느냐며 수백차례 편지를 했지만 딸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이씨는 딸이 방송국에서 일한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통일전망대」나 「남북의 창」 등 북한 관련 TV프로그램은 한번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다고 했다.

 

이후 성씨에 대한 소식은 1992년 독일유학생 출신 간첩 오길남이 자수하면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성씨가 한국 내 지하방송으로 위장, 대남방송을 해온 「한민전」 산하 「구국의 소리」 방송에서 방송요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 남한 출신을 감추기 위해 성씨는신서연이라는 가명을 썼다고 오씨는 증언했다. 또한 북한 중앙당은 이들이 남한에 대한 애착을 버리도록 본인의 희망과는 달리 성씨를 북한 출신의 김일성 종합대 교수와 강제 결혼시켰다고 오씨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