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1일

러시아, 체첸 침공

산풀내음 2016. 11. 3. 22:33

1994 12 11,

러시아, 체첸 침공

 

체첸은 러시아 남서부의 캅카스 지역에 위치한 러시아의 자치공화국 중 하나이며 수도는 그로즈니이다.

 

 

1) 시대적 배경

 

16세기부터 캅카스 지역의 한 민족이던 체첸인들은 이슬람교 문화권에 고유의 체첸어를 사용하는 독자성을 띄고 있었다. 18세기 말부터 러시아 제국의 캅카스 일대에 대한 정복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을 캅카스 전쟁이라고 한다. 격렬한 저항 때문에 거의 반세기에 걸쳐 전쟁은 지속되었고 1859년에서야 러시아는 이 일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일시적으로 체첸인들이 독립하였지만 소련 1921년에 이 지역을 다시 점령하였다. 제2 세계대전 독일군이 캅카스 지역으로 진군할 때, 이들에게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1944 2월에 체첸 인구의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50여 만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다.

 

소련이 붕괴되던 1991, 그 해 10월에 체첸의 대통령에 취임한 조하르 두다예프는 1993년에 체첸의 독립을 선언, 비 체첸계 주민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신생 러시아에게는 체첸 지역의 유전과 송유관 시설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체첸의 독립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체첸 초대 대통령 조하르 두다예프는 소련에서 군복무했던 시절 소련 공군 소장까지 맡을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뽐내었던 인물이다.

 

2) 1차 체첸 내전

 

1994 12, 당시 러시아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은 체첸 내부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직접 정규군을 투입하여 두다예프를 대통령 자리에서 축출시키고자 하였다.

1211, 러시아군은 6,000여명의 병력을 필두로 기갑부대가 수도 그로즈니를 향해 돌격했다. 초반에는 철도역 등의 요충지가 별 저항 없이 접수되면서 작전이 성공했다는 낙관론이 들었다. 그러나 그로즈니 시가에 진입한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선봉부대인 제 131 마이코프 여단만 해도 T-72 전차 26대 중 20, BMP 보병전투차 120대 중 102대를 손실하였다.

 

최종적으로 그로즈니 전투에 러시아군 5만명, 체첸군 1.2만명이 투입되어 6:1의 병력우세를 보였음에도 이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도 러시아군은 수도 그로즈니를 1995 2월에 접수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한동안은 매우 쉽게 승기를 거두나 6월 샤밀 바사예프가 이끈 부데노프스키 병원 인질극으로 발목 잡히는 동안 체첸군이 재정비를 했다.

러시아군은 이후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1996 6월 두다예프를 공습으로 암살하는데 성공하지만 체첸군의 게릴라전으로 상당한 전력 손실을 당했다.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한 1차 체첸 전쟁은 1996에 끝이 났다. 1997 5에는 새 평화 협정을 체결이 조인되어 러시아와 체첸 공화국은 5년간의 정전이 합의되었다. 이 조약으로 체첸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다.

 


황폐화된 수도 그로즈니

체첸 내전 중 러이아군

 

3) 2차 체첸 내전

 

평화 조약 이후 새롭게 구성된 체첸 정부는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 1999 8월 7, 샤밀 바사예프가 이끄는 와하비즘 이슬람교 원리주의 무장세력 1,000명을 이끌고 다게스탄 공화국 국경을 침범해 일부 마을이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 동시에 모스크바 아파트가 폭파되는 테러사건이 발생해 백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되었다.

 

19999월 23 러시아 정부는 체첸에 대한 전면 공습 개시해 1 체첸 전쟁의 종식 이후 최초로 체첸의 수도인 그로즈니 TV 송신센터, 공항, 병원, 정유시설을 파괴하였다. 러시아는 15만 명의 병력과 첨단장비를 동원, 무차별적인 공세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체첸반군은 대부분 사망했고 생존한 소수의 반군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반군 총수인 바샤예프도 러시아군에 의해 사살됐다. 체첸 진압 작전을 주도한 당시 47세의 대통령 권한 대행 푸틴은 대 체첸 강경정책으로 인기가 급상승, 2000 3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푸틴 정부 역시 체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체첸 회교 반군의 무차별적 테러 공격이었다. 2003 10 23일 모스크바 타간스까야 광장 근처 문화의집에 체첸반군으로 보이는 무장괴한 3~40명이 난입, 700여 명의 관객을 인질로 경찰과 대치하는 최악의 인질극이 벌어졌다. 푸틴 정부는 마취가스를 사용하고 특수부대를 투입, 무장괴한 전원을 소탕했지만 피의 보복은 계속됐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체첸반군은 2004 5 9 2차대전 승전 기념식장에 폭탄테러를 가해 친러파인 카디로프 체첸 대통령을 비롯한 수십 명을 살해했다. 러시아군도 2005 3월 체첸 반군지도자 마스하도프를 사살,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체첸사태는 아직도 많은 문제를 남긴 채 러시아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2004 94일 러시아 군이 베슬란의 한 초등학교에서 인질극을 벌인 체첸 반군을 진압한 뒤, 주민들이 숨진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