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8일

한일수교 협상시작 14년 만에 비준서 교환

산풀내음 2016. 11. 8. 21:06

1965 12 18,

한일수교 협상시작 14년 만에 비준서 교환

 

1965 12 18일 오전1036,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무장관이 서울 중앙청에서 한일기본조약과 협정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한일(韓日)간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험난했던 여정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4년간의 흥정은 단 10분 만에 끝이 났고, 참석자 얼굴에는 착잡함이 배어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5 12 17일 청와대에서 한일기본조약문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이후락(비서실장), 정일권(국무총리), 이동원(외무장관), 김동조(주일대사) 등 친일관리들의 모습이 보인다.

 

1965 12 18일 서울 중앙청(현재 경복궁 자리)에서 한국 측 대표 이동원(앞줄 왼쪽) 외무부 장관과 일본 측 대표 시이나 에쓰사부로(앞줄 오른쪽) 외무상 등 한·일 양국 관계자들이 6 22일 조인한 한일기본조약 비준서를 교환하고 있다.

 

양국이 처음 테이블에서 마주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 10. 예상대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양국의 시각차가 너무 컸고, 구보다 망언, 휴전, 4·19혁명 등이 이어지면서 궤도이탈이 반복됐다. 하지만 갓 출범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고, 일본은 한참 달아오른 진무경기(神武景氣)를 이어갈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소련·중국에 대항하는반공블럭이 절실했던 미국으로서도 양국 관계 개선은 시급한 과제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 11월 서울에서 스기 미치스케(杉道助) 6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를 맞이하고 있다. 스기는 정한론(征韓論)의 원조로 통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조카 아들로 일본 관서지역 재계의 거물이었다.

1962 11월 일본 도쿄에서 김종필(왼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청구권 문제 등 한일관계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오히라는 이후 중일 국교정상화를 주도했고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 총리가 된다.

 

논란이 됐던대일청구권문제는 줄다리기 끝에 총8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로 매듭지어졌지만 양국 모두 불만이었다. 35년간의 피해보상액으로는 너무 적다는 것이 한국민의 불만이었다면, 일본의 당시 외환보유고(18억달러)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 일본인의 정서였다. 한일 수교 이후 한국은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지만 상습적인 대일무역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쿠데타 직후부터 서둘렀던 한, 일 국교정상화작업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던 1965년 당시 제2의 을사늑약을 방불케하는 소위 한, 일 기본조약의 국회비준을 앞두고 당시 야당은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하는 초강경책으로 결사 반대했던것은 물론, 전국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반시민들까지 떨쳐일어나 전국적으로 맹렬한 반대시위가 그치지 않았고, 이에 놀란 박 정권은 마침내는 서울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주요대학에 계엄군을 진입시켰다.

 

1964 3 28 "내가 이완용이다. 내게 침을 뱉어라"라고 외치며 연좌데모를 하는 경희대 학생들.

1964 5 20일 한·일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 주관하에 각 대학생들은 서울문리대에서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민족적 민주주의의 관을 들고 장지인 망우리로 향해 행진하고 있다.

1965 4 14일 종로구 명륜동 입구에서 한·일협정 반대와 평화선사수를 외치며 시위하다 경찰에 쫓기고 있는 성균관대생들.

1965 6 23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반대를 외치며, 이화여대 정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한·일협정 반대 200시간 단식투쟁을 끝까지 벌여온 65명의 서울법대 학생들은 1965 6 22일 일본 동경에서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원이 비장한 눈물을 흘리면서 '민족주체성 확립', '조국자주성 확립'이라는 혈서를 쓰고 있다.

 

KBS일요스페셜, ‘최초공개 베일 속의 한일 협정문서, 한일양국 정부는 왜 40년 동안 침묵하나에서는 한일협정과 관련하여 미중앙정보국(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 한일관계의 미래에 관한 당시의 특별보고서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민주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다. 일본 기업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1961-65년 사이의 민주공화당 예산의 2/3를 제공한다. 6개 일본기업이 총 $6,600만를 지불했고 기업별로 액수는 1백만에서 2천만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김종필은 한일 협상을 추진한 대가와 일본 기업들로부터 한국에서 독점권을 행사하도록 해 준 대가를 받았으며, 한국 정부가 방출한 쌀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함께 통제했던 한국 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게 $115,000를 주었다고 한다』

 

KBS일요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