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0일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처형

산풀내음 2016. 11. 10. 20:27

1955 12 20,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처형

 

박헌영(朴憲永, 1900 ~ 1955)이 평안북도 철산군 내의 산골에서 고문을 받다 1955 12 20일 처형됐다. 그는 공산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 운동가,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약하였으며,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다.

 

 

박헌영은 몰락 양반가 출신으로 당시 지역의 유력가 지주이며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박현주(朴鉉柱)와 소실인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박현주의 정실 부인과 그 자녀들에게 심한 차별대우와 핍박을 당하면서 평등사상을 키우게 되었다. 핍박에도 열심히 공부하여 1919 3월에 당시의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를 졸업했다.

 

특이한 사항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박헌영이 기독교 신자가 되어 한때나마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 소속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박헌영은 보통이 아닌 인물들을 처음 만나게 된다. 뒤에 자신의 정적이자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인물들, 김구, 김규식, 이승만, 여운형, 여운홍, 조봉암 등을 만났던 것이다. 여운형, 김구, 김규식, 이승만 등은 모두 기독교 신자로서 당시 조선인 계몽활동인 YMCA청년회 사업의 지도자로 적극 참여하고 있었고, 조봉암, 여운홍 등도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20 9월에 일본 동경을 거쳐 곧바로 중국 상해로 망명, 그곳의 기독교청년회(YMCA) 강습소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한편,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사회과학 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인 사회주의 공부의 첫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 이르우츠크파 고려공산당원이었던 김만겸 등에게로부터 인간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지상최고의 덕목이라는 대화에 감동받은 박헌영은 바로 공산당 입당 결심을 한다. 만인이 평등하고 세상이 평등하다는 설교에 감복한 박헌영은 임원근·김단야·최창식 등과 함께 김만겸(金萬謙)의 이르우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르우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이르우츠크파가 임시정부 재창조론을 주장하며 여운형을 지도자로 삼고 탈당을 할때 박헌영도 함께 탈당을 하였다.

 

그 후 1921당원 허정숙(許貞淑)의 소개로, 뒤에 국내에서 결혼하게 되는 주세죽(朱世竹)을 만나 잠시 열애에 빠지기도 하였다. 주세죽은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 등을 주도하며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 일제는 그를 “여성 사회주의자 가운데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 감시했다. 그는 1924 5월 서울에서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1월 경성(京城)여자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했으며 4월에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박헌영이 일경에 붙잡힌 뒤 그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박헌영 가족사진, 부인 주세죽과 딸 박비비안나

첫 부인 주세죽은 1933년 박헌영이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된 후 징역형을 받고 수감생활 중 주세죽은 소련으로 건너가 ‘한베라’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거기서 그는 1934년 김단야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소련에서도 주세죽은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았다. 주세죽은 1938년 일본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주거가 제한되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어 1946년 형기를 마친 뒤에도 그곳에서 살다가 1950년대 중엽에 죽었다

 

박헌영은 1922 1월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와, 4월에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조선에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해 귀국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의 법원에서 1 6개월의 형을 받고 복역했다. 1924 1월에 출옥,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기도 했으나, 사회주의 경력 때문에 쫓겨났다.

 

사회주의에 대한 박헌영의 이론적 정리는 1926 4 26일 신의주 형무소에서 쓴공산주의라는 제목의 문건에 나타난다. 이 문건은 그가 양면 괘지에 잉크로 쓴 27쪽의 소논문인데, 형무소 당국이 신의주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보낸 것이다. 그 내용은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으로써 표현자체가 설교식 어조로 되어 있다.

 

일제에 의한 다섯 번에 걸친 조선공산당 탄압 이후 당이 해체되면서, 1927 12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지도자이자 한국인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체포와 수배, 도피, 은신 중에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 1945 8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그것 외에도 해방 후 박헌영은 대구폭동사건, 여수-순천 반란 사건 등 커다란 사회 불안을 조성했다. 핵심공산당 간부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으로 검거가 임박하자, 박헌영은 1946 9 5일 동료들과 함께 관속에 누운 채 영구차 행렬로 자신들을 위장해 북한으로 탈출한다.

 

19489북한 정권 고위직에 임명되었고, 남북노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형성되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때만 해도 박헌영의 영향력은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월북했을 당시에는 그를 따라 월북하거나 전쟁 발발 후 월북한 남로당계 인물들이 수천에서 만까지 이르게 있었다. 우리가 아는 카프계 작가들도 거의 다 이쪽에 속해있다.

 

그러나 박헌영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휴전선 이남이었고 머릿수가 아무리 많다한들 북한에서 세력을 떨칠 수 있는 기반은 없었다. 게다가 박헌영이 북조선에서 '부수상' '외무상' 자리에 있는것도 '이름뿐인' 권력이었다. 게다가 주요 공산주의 정파인 남로당계, 연안파, 소련파, 만주빨치산계들간의 연합정권으로 내각 수상에 올랐던 김일성에게는 남로당계의 거두 박헌영이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박헌영과 김일성은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했고 오월동주의 신세나 다름없었다. 결국 남로당계는 점점 주도권을 잃어갔으며, 박헌영도 실질적으로는 김일성으로부터 눈밖에 나지않도록 행동했을 정도였다.

 

1949 8, 박헌영의 비서인 윤레나와의 두번째 결혼식에 나타난 김일성

박헌영과 김일성, 吳越同舟(오월동주)?

1949년 모스크바에 나타난 김일성(오른쪽 끝)과 박헌영(오른쪽에서 두번째). 6.25 전쟁 허가를 받기 위해 스탈린을 만난다.

 

1950, 박헌영은 일생일대의 패착이자 악수를 두고야 만다. 한국전쟁 직전 김일성에게 "조선인민군을 남한으로 내려보내면 남한의 남로당원 20만 명이 이에 호응할 것"이라는 엄청난 주장을 한 것이다. 이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이 주장은 후에 박헌영이 북한과 남한 양쪽에서 철저히 까이고 매장당하는 계기를 마련한 원인이 되었다. 이때문에 박헌영은 한국전쟁 책임공방에 대해서 김일성과 더불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문제는 그가 자랑하던 남로당원의 실체가 허상이었다는 것이었다. 가장 도움이 될 군조직의 경우, 남한에서는 이미 여순사건 이후로 남한 군 내부의 남로당원들은 숙군작업으로 조직이 뿌리뽑힌 상황이어서 호응할 군대가 없었다. 결국 "남조선에 쳐들어가기만 해도 우리 남로당원의 호응에 남조선은 3일만에 무너질 것"이라는 박헌영의 주장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진격을 멈추고 그걸 기다리는데 써버렸고, 한국과 UN군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어버렸다. 그나마 2~4만 정도로 추정되는 남한의 빨치산(파르티잔) 병력이 호응하여 지리산내장산 등에서 활동, 박헌영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결국 박헌영은 한국전쟁 책임론에 휩싸여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 3월에 체포당한다. 당시 체포당한 이유는 '리승엽이 미군과 비밀리 내통한 간첩의혹'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승엽은 6.25 전쟁 때 인민군 서울점령 치하 때 대한민국 국군유엔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었다. 박헌영만 믿고 있던 남아있는 남로당계 인사들도 빗자루로 쓸리듯 쓸려버렸다. 1953 7 27일 한국전쟁이 휴전(정전협정)이 되고 북한에서 8월 한 달 동안 검거된 남로당원이 무려 2천에 달한다.

 

1955 12 15,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명은 '피소자 박헌영의 북한정권 전복음모,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북한 최고 재판소에서는 박헌영을 일방적으로 '미제의 간첩'이라고 몰아붙힌다. 사실 북한측에서 주장하는 '박헌영의 미제 스파이'의 근거들은 하나같이 말도안되는 억지스러운 것들 주장들이다. 재판장에서 박헌영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마지막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중략) 나는 조국의 해방과 독립 통일을 위해 미국인과 만난것이지 결코 너희들이 말하는 간첩행위가 아니다.(중략) 그대들 말대로 내가 미국의 스파이였다고 하자. 모든 것은 내가 주도했을 뿐 남로당 간부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과 통일, 사회주의 혁명과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나에게 떨어진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이든 간에 달게 받겠으니 죄 없는 남로당 간부들을 용서해달라. 거듭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