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0일

미국, 파나마 침공

산풀내음 2016. 11. 10. 20:32

1989 12 20,

미국, 파나마 침공

 

미국이 1989 12 20, 파나마의 군부 독재자 미누엘 노리에가(Manuel Antonio Noriega Moren, 1934 - 2017)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파나마를 침공했다. 미국과 노리에가는 그동안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노리에가가 파나마를 마약조직의 중간 거점으로 제공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구나 노리에가가 미국의 첨단 기술과 첩보를 공산권에 팔아넘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노리에가는 1934년 혼외자식으로 태어나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페루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노리에가는 파나마 군에 입대해 오마르 토리호스 장군의 비밀경찰 수장이자 핵심 참모로 지내면서 빠르게 진급하였다. 그리고 토리호스가 1968년 쿠데타에 성공해 대통령이 되자 그는 군정보사령관에 오르며 정치권력화되어갔다.


한편 노리에가는 냉전 때인 1966년부터 CIA를 위해 일했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CIA 장관시절일 때부터 그 앞잡이로서 쿠바피델 카스트로 정권과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 등 중남미와 카리브해의 좌파정권 교란에도 협력했다. 또한 미국의 마약대책에도 협력하여 이러한 업적으로 1978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의 마약단속국(DEA)로부터 매년 감사장을 받을 정도였다.

 

1981년 6월 31일 대통령이자 파나마의 독재자인 오마르 토리호스가 의문의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자 대장으로 진급했고 사실상 파나마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사실 이 사고는 노리에가가 꾸민 사고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1983년 노리에가는 군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1984 16년 만에 직선제에 의하여 대통령에 바클레타가 당선되었지만 노리에가는 그 위에 군림하였고 1985년 바클레타를 계승한 대통령 델바에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권력을 바탕으로 콜롬비아 마약밀매조직이 파나마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마약을 운반하는 것을 용인하기도 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민족적 반제국주의적 외교정책을, 안으로는 군부독재체제를 추구, 집권 이래 줄곧 미국 정부와 끈질긴 신경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 국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파나마 최대의 정보기관인 G2 사령관 출신이기 때문에 그는 1만 5천명 규모의 파나마 국방군의 무력을 가질 수 있었고 야당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국민들의 불만을 샀으나 독재체제는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7년 전직 참모총장의 노리에가 비리 폭로를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그의 비리에 추가적인 폭로가 계속되었고 결국 그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 미국 법무부가 그를 마약밀매혐의로 기소하자, 대통령 델바에는 1988년 노리에가를 해임했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는 의회는 오히려 대통령 델바에를 축출하고 노리에가를 국가 수반으로 추대함으로써 그의 찬반세력 간에 대결이 심화되었다. 결국 노리에가는 1989년 12 15일 미국과의 전쟁상태를 선포하면서 미군장교 1명을 사살하자 미국은 총 2만 6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12월 20일 파나마를 침공했다. 작전명은 정당한 명분(Operation Just Cause 1989)였다.

 

At a 1989 public rally in Santiago, Panamanian dictator Manuel Noriega speaks harshly about U.S. involvement in Panamanian affairs, accusing the Bush administration of direct involvement in the unsuccessful coup attempt to remove him from power.

 

미군 신속대응부대 82 공수사단

 

20일 오전 1, 75 레인저 연대의 1개 중대 병력이 낙하산으로 투입되어 오마르 토리조스 국제공항과 토큐먼 활주로를 장악했고, 같은 시간 레인저의 다른 병력은 리오하토 공항과 노리에가의 해변 관저를 급습하는 것으로 침공이 시작되었다. 불과 2~3천명 수준의 파나마 방위군은 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단 하루만에 27개의 공격목표를 성공적으로 접수한 미군은 파나마 주재 교황청 대사관으로 피신한 노리에가를 포위한다. 미군의 심리전 부대는 대사관 건물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는 노리에가를 압박하기 위해 대형 확성기를 동원, 24시간 내내 시끄러운 록음악을 틀어댔다. 이러한 대치상황은 1990 1 3, 노리에가가 투항함으로써 종결된다. 그리고 파나마군은 한달간 저항하다가 1 31일에 항복했다.

 

 

F-117 스텔스 전투기 등 각종 최첨단 무기를 동원한 미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459(파나마 시민단체 주장은 3 5백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1 5천명의 파나마 시민이 집을 잃어야 했다.

 

마이애미 연방법원에서 미국 내 코카인 밀거래와 공갈, 돈세탁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19년간 복역했다. 하지만 전쟁 포로로 특별대우를 받았으며, 텔레비전과 편의시설을 갖춘 주택에서 형기를 마친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2007 9월 특별한 징역이 끝난 뒤 2010 4월 프랑스로 송환돼 프랑스 은행을 통해 마약 자금을 세탁한 혐의 등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파리에서 복역했다. 2011 12 11일 조건부 석방되어 고국으로 송환되었지만, 파나마에서 따로 정적 살해죄 세 건으로 최소 20. 최대 6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2017년 향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집권당시 마누엘 노리에가(), 체포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