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2일

드레퓌스 종신형 선고

산풀내음 2016. 11. 12. 05:27

1894 12 22,

드레퓌스 종신형 선고

 

유태인이면서 프랑스군 장교인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 대위가 1894 12 22일 군사기밀을 독일에게 팔아넘겼다는 혐의로 프랑스 군사법원으로부터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단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The Dreyfus family, taken in 1905(right)

 

드레퓌스 사건의 발단이 터져 나온 시기는 1894년으로, 당시 프랑스는 이전 1871년의 보불전쟁에서의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의 통일을 이루려는 오토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던 나폴레옹 3프랑스 제국이 가열차게 충돌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가 패함으로써 스트라스부르와 메스를 상실하고, 마침내 독일은 통일을 달성,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고는 50억 프랑의 보상금을 요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결정적으로 보불전쟁의 패배는 프랑스가 더 이상 서유럽의 육군 최강국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94 9월 어느 날, 프랑스의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훔쳐낸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대사관 무관이었으며 발신인은 익명이었고,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명세서'였다. 스파이 활동의 거점인 독일대사관을 감시하는 참모본부는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을 찾기 위한 수사를 시작했다.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평범한 유태인 장교인 '드레퓌스'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물론 이 같은 판단에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그 해 12, 군사법정의 비밀재판에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참모본부는 "국가안보를 위해서 증거를 공개할 수 없지만 대역죄인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는 간단한 설명으로 확실한 증거의 공개를 요청한 일부 양식 있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재판이 끝난 지 15개월이 흐른 뒤 참모본부 정보국의 삐까르 중령이 우연한 기회에 드레퓌스 사건의 서류철에서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과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보병 대대장인 에스떼라지 소령의 필적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삐까르 중령은 이 엄청난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그의 상관들은 자신과 참모본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두기를 원했고 삐까르 중령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정의감과 책임감이 강한 삐까르 중령은 드레퓌스의 형 마띠외와 드레퓌스의 아내 루시와 함께 드레퓌스의 무죄 입증을 위해 다시 뛰었고 다시금 드레퓌스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프랑스 국민은 둘로 갈라졌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가 그것이다.

 

당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분열을 보여주는 만평

 

공화제와 프랑스혁명의 이념에 반대하는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드레퓌스를 감옥으로 보낸 군부, 반유태주의에 몰두한 과격 가톨릭주의자, 보수적인 정치인들, 군국주의자들 및 이들과 연계된 신문들이 재심 반대의 깃발을 높이 들고 군중을 선동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유태인의 음모를 경고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양심적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 정치인들, 소수의 신문이 재심 요구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 사건을 유산계급 내부의 투쟁으로 보고 구경만 하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자계급이 뒤늦게 여기에 가담하였다. 미국, 러시아, 유럽 등 세계의 지식인들도 지지성원을 보냈다.

 

여기에 1897 1 13일에 프랑스 대문호인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의 무죄와 진실을 묻어 버리려는 사람들을 경고하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진실의 궁극적 승리를 장담하였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하여 1897년부터 1900년까지 3년 동안 쓴 13편의 글을 모아 ‘멈추지 않는 진실’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

에밀 졸라는 군법회의를 중상 모략했다는 죄로 기소되었고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프랑스는 다시 한번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발작적인 반유태주의 물결에 위협을 느낀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이윽고 프랑스 곳곳에서 유태인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이 조직되었다.


에밀 졸라(1840-1902)

 

그런데 1898 8 30, 삐까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떼라지와 짜고 문서를 날조했던 참모본부의 앙리 중령이 진상이 발각될 위기에 몰린 나머지 자살을 하였다. 그러자 에스떼라지는 재빨리 영국으로 도망가 자신은 이중첩자로서 상부의 명을 받고 독일의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 했다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였다.

 

마침내 1899 6 3일 고등법원은 1894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그러나 재심에서도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계속 거짓증언을 했고 군사법원은 그에게 '정상참작'이라는 이유를 들어 금고 10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졸라는 다시 한번 펜을 들었고 세계 언론의 비난과 진보적 정치인의 공세에 위기에 몰린 대통령은 1899 9 19일 드레퓌스를 특별사면하였다. 그는 자유를 되찾았고 아내 루시를 포옹하였다.

 

드레퓌스는 1904 3, 재심을 청구했고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선고를 받았다. 같은 해 7,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프랑스 육군 소령으로 복귀하는 의식을 치르고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는 무개차에 올라타고 형 마띠외와 아들 피엘을 양옆에 세우고 연병장을 나섰을 때 자발적으로 모여든 20만 인파가 일제히 모자를 벗어 들고 경의를 표했다. 창백한 드레퓌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프랑스군 만세! 진실 만세! 드레퓌스 만세! 정의 만세!"

 

이날의 무죄판결은 그 동안 유태인인 드레퓌스에 대한 군대내의 편견과 선입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프랑스 법원의 양심을 드러낸 일대 결단이었다. 집단적 편견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드레퓌스를 구해낸 프랑스 지식인의 집단적 저항은, 지식인의 양심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