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2일

이재명, 을사5적의 이완용 습격

산풀내음 2016. 11. 12. 06:13

1909 12 22,

이재명, 을사5적의 이완용 습격

 

열혈 청년 이재명이 1909 12 22일 한성부의 종현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에서 2 17일에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2세 추도식에 참석한 `을사5` 중의 으뜸 매국노인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이재명은 교회당 앞길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잠입한 뒤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 이완용을 공격했다. 이완용 암살을 위해 먼저 인력거꾼의 가슴을 찔러 거꾸러뜨린 후 바로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이후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수차례 어깨 등을 찔렀으나 곧 일본 경찰들이 쏜 총에 넓적다리를 맞고 체포되었다. 인력거꾼은 숨지고 이완용은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회복해 이듬해 8월 총리대신으로 정부의 전권위원이 돼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재명은 현장에서 체포돼 이듬해 5월 사형을 선고 받고 9 30 24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당했다.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은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서울지방재판소에서 방청석을 향하여 열렬한 언변으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는 연설을 하는가 하면, 일본인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눈을 부릅뜨고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하고 고함을 쳤다.

그 뒤 재판이 계속되어 재판장이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2000만 민족이다“고 말한다. 그러자 창 밖에서 “옳다!” 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을 죽이고자 한 이유에 대하여 이완용은 이미 일곱 가지의 큰 죄를 지었으므로 나는 항상 그가 회개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회개는커녕 또 한 가지의 큰 죄를 더해 여덟 가지 죄를 지었으니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여 없애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랑으로 처단하려 한 것이다라고 했다.

, 재판장을 호령하여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하고 노기를 띠었다.

 

그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재판장을 꾸짖어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1910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란 말을 남겼다.

 

한편 이완용(1858-1926)은 일본 최고의 의술의 도움으로 두 달만에 목숨을 구했다. 당시 조선말 매천야록과 대한매일신보 자료에 따르면 이완용은 며느리 임걸귀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 인간말종이었고 또한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이완용에게 갖다 바치는 뇌물을 넘쳐 흘렀다고 한다. 한편 우국지사 황현의 글 등 자료에 따르면 이완용의 아들 이승구는 자신의 부인과 아버지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자살했으며 이완용은 이런 자식에게 미안함을 가지기는커녕 호적에서 삭제시켰다. (이에 대하여 사실과 다르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그의 행실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이미 인간이길 포기했기에…)

천륜을 어겨 며느리를 급탈하고 아들을 죽게 만들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어머니와 같은 나라를 팔아 먹은 이완용은 이후 부귀영화를 누리고 30년 가까이 더 살았다.

 

1907 7 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데 앞장선 이완용. 고종은 평상복을 입고 우측 옆(붉은 테두리 부분)에서 지켜보고 있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 이재명은 1904년 열여덟살의 나이에 하와이로 이민을 갔으나 제1-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항일운동을 위해 1907 10월 조국으로 되돌아왔다. 1909 1월 이토 히로부미의 평양 방문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하려 평양역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순종 황제가 동행한다는 소식에 순종 황제에게 피해가 갈까 우려한 안창호 선생이 만류해서 단념했다.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사살되자 목표를 상실한 이재명은 매국노인 이완용의 암살로 목표를 바꿔 이날 거사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