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6일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사망

산풀내음 2016. 11. 13. 09:43

1972 12 26,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사망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 5 8 ~ 1972 12 26)은 미국의 제34부통령(1945), 33번째 대통령(1945 4 12~1953)이었다. 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부통령이 된 지 불과 82일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제2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국왕인 히로히토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핵공격 명령을 내린 강력한 대통령이다.

 

 

1947 3 12, 트루먼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는 선언을 하였다. 그는 "미국의 목적은 한 사람이 독재정치를 하는 공산 제국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영토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퇴임 후, 그는 키가 작아서(175 cm) 붙은 애칭인 "리틀 맨(little man)"이 아닌, 서방세계를 공산주의로부터 막아낸 거인이란 뜻의 "리틀 빅 맨(Little Big Man, 작은 거인)"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1972 12 26,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한국전과 관련하여서는 1949 3월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한국은 미국의 방어선 외곽에 있다고 했다. 1950 1월 애치슨 국무장관도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아시아의 대륙에 위치한 곳은 모두 미국의 방어선에서 빠진다고 했다. 트루먼도 당시는 군부의 건의대로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 시킨다. 이 점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는 데 큰 빌미를 주었다.

 

6.25 발발하자 트루먼은 그 즉시 서울 지역의 미국 시민을 철수시키고, 맥아더에게 지시하여 탄약과 무기를 포함한 보급품을 공중 투하하고 7함대를 필리핀으로부터 대만과 중국 본토 가운데로 이동시키도록 하였다. 이처럼 트루먼이 결정한 한국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 원조는 스탈린과 많은 서방 인사들마저 놀라게 하였다.

 

트루먼과 맥아더 두 사람간의 갈등은 중국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시점부터 불거졌지만, 한국전을 어떤 방식으로 끌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트루먼은 전쟁을 38도선에서 제한한다는 내용을 맥아더 원수에게 몇 차례 하달했지만 맥아더는 그 명령에 냉담했다. 맥아더는 중국군이 참전하자 대만 국부군의 활용과 최후의 수단으로 핵무기를 통한 만주로의 확전을 제안했다. 또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전면전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 3 12, 트루먼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는 선언을 하였다. 그는 "미국의 목적은 한 사람이 독재정치를 하는 공산 제국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영토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퇴임 후, 그는 키가 작아서(175 cm) 붙은 애칭인 "리틀 맨(little man)"이 아닌, 서방세계를 공산주의로부터 막아낸 거인이란 뜻의 "리틀 빅 맨(Little Big Man, 작은 거인)"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1972 12 26,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한국전과 관련하여서는 1949 3월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한국은 미국의 방어선 외곽에 있다고 했다. 1950 1월 애치슨 국무장관도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아시아의 대륙에 위치한 곳은 모두 미국의 방어선에서 빠진다고 했다. 트루먼도 당시는 군부의 건의대로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 시킨다. 이 점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는 데 큰 빌미를 주었다.

 

6.25 발발하자 트루먼은 그 즉시 서울 지역의 미국 시민을 철수시키고, 맥아더에게 지시하여 탄약과 무기를 포함한 보급품을 공중 투하하고 7함대를 필리핀으로부터 대만과 중국 본토 가운데로 이동시키도록 하였다. 이처럼 트루먼이 결정한 한국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 원조는 스탈린과 많은 서방 인사들마저 놀라게 하였다.

 

트루먼과 맥아더 두 사람간의 갈등은 중국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시점부터 불거졌지만, 한국전을 어떤 방식으로 끌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트루먼은 전쟁을 38도선에서 제한한다는 내용을 맥아더 원수에게 몇 차례 하달했지만 맥아더는 그 명령에 냉담했다. 맥아더는 중국군이 참전하자 대만 국부군의 활용과 최후의 수단으로 핵무기를 통한 만주로의 확전을 제안했다. 또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전면전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아더는 해임 뒤 미국민의 엄청난 환영 속에 전쟁영웅으로 귀국하고 몇 일 뒤 열린 미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역사의 전면에서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