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5일

벨기에 레오폴드 2세, 콩고를 개인 식민지화

산풀내음 2016. 12. 10. 20:21

18852 5,

벨기에 레오폴드 2, 콩고를 개인 식민지화

 

1885 2 5,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Leopold II, 1835-1909)가 아프리카 서부 해안 지역을 콩고 자유국으로 선포했다. 세계 유일의 개인 소유 식민지였다.

 

레오폴드 2세(좌), 지금 스탠리와 함께 현세에서 저질은 죄값을 아비지옥[]에서 치르고 있을 것이다.

 

레오폴드는 스탠리의 도움으로 콩고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고 콩고를 자신의 사유지로 만들었다.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4) 1년간의 오지탐험 끝에 5년간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리빙스턴을 찾아낸 불굴의 모험가이자 세계적인 기자로 알려져 있지만 영화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잔인한 카츠 대령의 모델이기도 하다. 역사에 따르면 스탠리는 ‘1877~1884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후원을 얻어 콩고 지방을 탐험, 콩고 자유국의 기초를 닦은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 스탠리. 그에게 노예는 그냥 동물과 같은 존재였다.

 

스탠리는 콩고에서 용병을 앞세워 무력으로 원주민을 광산과 고무공장으로 내몰았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원주민은 손발이 잘려나갔고 인구의 절반인 1,000만 명이 죽어나가는 등 스탠리는 벨기에 영토의 80배에 달하는 콩고에서 공포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레오폴드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쓰여졌다. 결국 콩고의 실상이 세계에 알려져 거센 항의가 계속되자 레오폴드는 1908년 콩고를 사유지에서 벨기에령으로 바꾸며 책임을 회피했다.

 

레오폴드2세의 노예교역

존과 앨리스 해리스 부부는 1898년부터 1905년까지 콩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착취당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사진을 찍었다. 고무농장 감시자들에 의해 잘려나간 친척의 손을 든 아프리카 주민의 모습은 콩고를 폭력적으로 통치한 레오폴드 2세에 대한 비판 운동을 촉발했다.

손일 잘려나간 아이들

 

작가 코난 도일(Conan Doyle) 1909년에 발표한 콩고의 범죄(Crime of Congo)에서 레오폴드2세가 식민지 콩고에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애덤 호크실드(Adam Hochschild) 1988년 작품 레오폴드와의 유령(King Leopold’s Ghost)’에서는 그가 개인 식민지 콩고자유국에 가한 가혹한 노예교역을 통한 무자비한 수탈과 살육으로 1880-1920년 사이에 인구의 약 절반인 천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그의 책 제목은 바첼 린지(Vachel Lindsay)‘The Congo’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Listen to the yell of Leopold’s ghost

Burning in Hell for his hand-maimed host

Hear how the demons chuckle and yell

Cutting his hands off, down in Hell ….

 


 


[숨은 역사 2cm] 콩고 1천만명 학살 수입 유럽 매춘부가 차지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아프리카 중부 콩고민주공화국(이하 민주콩고)은 천연자원 왕국이다.

매장량을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4조 달러라는 추정도 있다.

개발이익만 골고루 나눠도 온 국민이 풍요롭게 살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생지옥이다. 국민은 1인당 총생산(GDP) 189달러로 굶주림에 허덕인다.

130년 이상 지속한 유혈사태 때문이다.

 

유엔평화유지군이 투입돼도 총성은 멎을 조짐이 없다.

최근 10년간 약 600만 명이 희생됐다.

고문과 신체절단, 성폭행 등 범죄도 기승을 부린다.

참상은 역대 최악인데도 외부세계는 잘 모른다. 국제사회의 무관심 탓이다.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1974년 조지 포먼과 세기의 대결을 펼친 국가라는 사실이 더 잘 알려졌다.

재앙은 서양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을 결정한 1884년 베를린회의 이후 시작된다.

원흉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

현지 약탈은 유명 탐험가 헨리 스탠리가 대리한다.

그는 추장들을 선물로 매수하고서 문서에 서명하게 한다.

"땅 소유권과 통치권을 영원히 넘긴다"라고 적힌 증서다.

한반도 11배나 되는 현재의 민주콩고 영토는 이렇게 빼앗긴다.

이 땅은 벨기에 국가가 아닌 레오폴드 2세 개인 소유가 된다.

그는 유럽에 남아 흑인 지원 자선가나 노예 반대 운동가로 행세한다.

수탈을 위장하기 위해서다.

 

잔학행위는 고무 채취 과정에서 주로 벌어진다. 고무는 당시 검은 황금으로 불렸다.

공급물량이 모자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자전거·자동차 타이어, 전선 절연재 등에 쓰이면서 품귀현상을 빚은 탓이다.

모든 원주민이 투입돼도 고무 수요를 맞출 수 없었다.

 

급기야 레오폴드 2세는 무장 군인을 동원해 '인간 도살'에 나선다.

군인들은 굶주린 야수였다.

기혼 여성을 감금하고서 남편에게 석방 조건으로 고무 할당량을 제시한다.

남편이 거부하면 곧바로 부인을 사살한다.

할당량을 못 채우면 손목을 절단한다.

목표량이 2~3차례 미달하면 손목과 목까지 자른다.

연좌제 방식도 동원한다. 죽은 사람 몫을 마을 전체가 떠맡되 모자라면 몰살을 각오해야 한다.

반항 주민에게는 무자비한 총질이 가해진다.

백인 통조림이 흑인 팔로 만든다는 소문을 퍼트리기도 한다. 공포에 떨게 함으로써 저항 의지를 꺾으려는 속셈에서다.

손이 잘린 어린이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야만행위가 일부 드러난다.

 

이때부터 서방세계가 압박해 1908년 통치권을 벨기에 정부가 갖도록 한다.

레오폴드 2세의 지배 기간에 최소 1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 대가로 챙긴 돈은 대부분 외국으로 빼돌린다.

 

1900년 알게 된 매춘부 카롤린 라크루아에게도 거액을 쓴다.

프랑스 빈민 출신 카롤린은 당시 16세로 50살 이상 어렸다.

2년 뒤 부인 사망 후에는 레오폴드의 정부가 된다.

카롤린이 임신하자 파리와 브뤼셀을 잇는 철도를 신설했다.

친정을 오갈 때 불편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카롤린은 파리 명품가를 돌며 뭉칫돈을 뿌리고 다녔다.

1909년에는 가톨릭 신부가 인정한 결혼식을 올린다.

며칠 후 카롤린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고서 눈을 감는다.


살인마에 대한 벨기에 여론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도로와 대형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는 이유에서다.

루이 미셸 벨기에 외무장관은 영웅으로 평가했다.

민주콩고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을 근거로 삼았다.

한반도가 식민통치 덕에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일본의 억지 논리와 닮았다.


민주콩고는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했으나 참사는 계속됐다.

레오폴드 2세가 뿌린 저주와 증오의 씨앗 때문이다.

민주콩고에 온정의 손길이 이어졌으나 미봉책에 그친다.

한국도 원조대열에 합류했다. 양국 간 무상원조 기본협정이 2017 3 11일 발효됐다.

민주콩고는 인도적 지원보다 내전 종식 노력이 더 중요하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지목한 전범을 넘기도록 민주콩고 정부에 압박도 가해야 한다.

벨기에 정부는 잔학행위 진상을 조사하고 사과해야 한다.

레오폴드 2세 재산 환수와 배상까지 이어지면 금상첨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