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5일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실시

산풀내음 2016. 12. 10. 20:33

19692 5,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실시

 

1900년대에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쳐야하는 입시 제도가 존재했다. 당시 국민학교 6학년 학생들은 ‘국6병’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치열한 중등 입시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경기중 입학은 경기고, 서울대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의 출발점이었다. 학생들은 ‘심신의 발육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과외에 시달렸으며 학교교육은 중학 입시에 따라 좌우됐다. 방과후 6학년 교사들의 집은 학생들의 과외방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학부모들의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 중학 재수생의 증가 등 사회문제로 홍역을 치렀다.

 

1960년대 중학교 입학시험

중학교 입학 시험 중의 하나인 체력장

 

전후 폐허만 남은 한국 사회에서 돈 없고, ‘없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믿을 것은교육이었다. 빈곤층부터 중상층까지 온 국민이 교육에 열을 올렸다. 언론은 연일 개천에서 용이 된 학생들의 사연을 앞다퉈 알렸고, 어린 학생들의 ‘4시간 수면은 미덕이 됐다.

 

학부모들의치맛바람이란 단어도 1960년대에 등장했다. 부모들은 아이의 성적과 진학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는전사가 됐다. 1964무즙 파동’, 1967창칼 파동은 당시 학부모들의 열성적인 치맛바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좋은 학군을 위해선삼천지교(三遷之敎)’나 위장전입도 불사했다. 1968 9월에는 학부모 3명이 자녀의 서울 전입이 제대로 안되자 문교부 장관실 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이를 막은 경찰과 멱살잡이를 해 종로서에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4년 무습파동은 1964 127, 서울지역 전기 중학교 입시 자연 과목 18번 문제가 발단이었다. ‘엿을 만드는 과정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서울시 출제위원회의 정답은 보기 1번인 ‘디아스타제’였다. 그러나 2번 ‘무즙’을 선택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침과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 있다’는 교과서 내용을 근거로 무즙도 정답이라고 주장하면서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졌다. 성난 학부모들은 실제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와 교육당국의 책임을 요구했다. 결국 법적 공방으로 이어졌다. 서울고등법원은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해 “39명의 불합격생을 구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입시제도 또한 현재의 대학 입시와 비슷하게 1945년도부터 많은 형태로 변천되었지만 소위 입시지옥이라 불리는 현상을 해소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과도한 입시경쟁 및 입시위주교육과 사교육 풍조가 일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968 7 15일 권오병 문교부 장관이 중학교 입시 개혁안을 발표하였고 이에 따라 1969 2 5일 중학입학 무시험 추첨이 서울에서 처음 실시됐고 1971년에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73년부터는 고등학교 입학시험도 연합고사로 대체되었다. 고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연합고사를 통과한 학생들은 추첨을 통해 거주지에 가까운 학교에 배정되었다.

 

중학교 입시 개혁안은 중학교 입학을 위한 과외수업의 폐단을 뿌리뽑고 사교육비 부담 과중 등을 해결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폐지하고 학군별 추천제를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세부적으로는 첫째, 1969년 서울을 시작으로 1970년에는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인천, 전주에서 1971년에는 전국 모든 중학교에서 입시제를 폐지하고 둘째, 학생들은 추엄을 통해 무시험으로 중학교에 진학하며 셋째, 일류 중학교는 단계적으로 3년 안에 학생모집을 중단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1969년 이후 진행된 중학교 무시험 진학을 위한 추첨 모습이다. 학생의 추첨 번호를 넣은 추첨기를 수동으로 돌리는 탓에 “뺑뺑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당시 추첨장 모습

무시험 추첨으로 중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입학실 날 함께 모여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기쁨을 나누고 있다. / 1971 3 3일 청주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