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15일

제1차 한일회담 개최

산풀내음 2016. 12. 17. 08:24

19522 15,

1차 한일회담 개최

 

1950 6 25일 대한민국에서 남북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미국은 한국의 배후기지가 되는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였기에 양국의 수교를 주선하게 된다.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의 중개로 1951 10 21일부터 열린 예비회담을 거쳐 제1차 한일회담이 1952 2 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한국은 재일교포의 영주권 문제, 강제퇴거 문제, 생활보호 문제에 있어서 특별한 대우를 요구했고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이때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정신적, 물질적 보상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인들이 한국에 남겨 놓은 재산 반환 문제를 언급하였다. 한국측은 이에 대해 미 군정법령 33호에 의해 몰수한 것이기 때문에 법률상 재산반환을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회담이 결렬됐다.

 

1953 4월 제 2차 한일회담이 열렸지만, 성과 없이 끝나고 만다. 한국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문서로 만들고 발표할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 같은 해 10 15일에 제 3차 한일회담이 개최되었고, 이번에도 일본은 자국민의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다. 한국은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청했고 이에 대하여 일본은 식민지 시절에 철도, 항만, 농지 조성 등 한국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유명한 구보다 망언이다. 한국은 망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1958 8, 일본에서 북송운동이 일어났고, 한국정부는 이에 대하여 제동을 걸고자 했지만, 결국 195912 14975명을 태운 선박이 니가타항을 출발해 북한으로 떠나게 된다. 이후 1984년까지 186차에 걸쳐 북송사업이란 이름으로 북송선을 탄 사람은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북송사업은 일본 정부가 범죄율이 높고 경제력이 약한 자이니치(재일조선인)에 대한 지원 경비를 줄이기 위한 차원에서 실시됐으며 이는 이후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인권 문제로 비화했다. 일본은 특히 당시 북한으로 건너간 자이니치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했던 것이었다.

 

1960 4.19혁명이 일어나고 그 해 10월에 5차 회담이 열렸다. 당시 일본은 한국이라는 시장이 필요했고 우리는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1961 11월 제6차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그리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는 1961 11 일본을 비공식 방문하여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와 함께 4억 달러를 요구한다. 그러나 일본의 거부로 끝이 났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1961 7월 정착성 예금의 금리 인상, 8월의 중소기업은행 설립, 1962 2월 국민저축조합법 제정, 6월의 통화개혁 등을 통해 국내 자금을 동원하려 했다. 그러나 경제는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국내자금 조달은 실패했고 실업은 증가했다. 1962년∼64년에 이르는 기간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5.6퍼센트 감소했다. 원조 감소와 수출 부진으로 인한 만성적인 외화 부족, 곡가파동으로 인한 식량부족과 물가 상승 때문에 경제는 전반적인 침체 국면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2 11월에 열린 제 7차 회담에서 김종필은 무상원조 3, 유상원조 2억 그리고 민간차관 1억 달러의 합의를 이끌어 낸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는 김종필-오히라 메모이고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5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2) 대외 협력 기금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 5(정부 차관). 3)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민간 차관).

 

1964년 봄김종필-오히라 메모가 폭로되면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시위가 절정에 달했고, 윤보선, 장택상, 유진오, 장준하 등에 의해 주도되는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되었으며 이는 학생운동을 지원, 고무, 독려하였다.

 

1964 12월에 7차 회담이 열렸고 결국 1965 6 22일 한국과 일본 정부는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에 서명한다. 당시 4가지 부속협정에도 사인하는데 오히려 핵심은 이후 깊은 상처를 남기는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청구권협정)’이었다.

 

1965 6 22일 한국과 일본 정부는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에 서명한다. 당시 4가지 부속협정에도 사인하는데 오히려 핵심은 이후 깊은 상처를 남기는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한일청구권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