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2일

초대 조선통감에 이등박문 취임

산풀내음 2016. 12. 28. 21:32

19063 2,

초대 조선통감에 이등박문 취임

 

1906 2 1일 을사늑약에 따라 공사관이 폐지되고 통감부가 설치됐다. 통감부의 임무는 합병을 원활하게 진행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임시 통감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이어 3 2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초대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고문 정치', '차관정치'라는 이름으로 크게는 외교에서부터 사소한 내정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며 병합수순을 밟아나갔다. 1907 7 19일 고종의 강제 퇴위, 1907 7 24일 통감의 권한을 강화한 '한일신협약'체결(차관정치 기틀 마련), 1907 7 3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 등 3 6개월 동안 합병에 필요한 모든 정치 작업이 이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우리에게는 '공적 1'로 불리는 이토는 일본인들에게는 근대 일본의 기틀을 마련한 최고의 정치가로 존경 받는 인물이다. 젊어서 영국과 독일의 선진문물을 접하고 돌아온 이토는 1885년 초대 내각 총리에 올라 메이지정부의 실권을 장악했고, 1888년에는 헌법초안을 심의하기 위해 설치된 추밀원 의장을 맡았다. 네 번의 총리직, 메이지 헌법 제정, 국회 개설 등 일본의 근대화에는 이토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유연하고 신중한 성격에 타고난 조정력으로 정치적으로는 승승장구했지만 사생활이 문란하고 허장성세에 능했다.

 

1909년 통감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일본의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했으나 그 해 10 26일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안중근 의사(義士)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68. 장례는 190911월 4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안중근 의사 저격 직전의 이또 히로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