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0일

독립협회, 첫 만민공동회 개최

산풀내음 2017. 1. 7. 19:23

1898 3 10,

독립협회, 첫 만민공동회 개최

 

1898 310, 종로 보신각 앞마당에 신분을 초월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독립협회가 주관한 첫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열린 이 날, 참석자가 1만 여 명을 헤아렸다. 당시 서울인구는 17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파였다.

 


 

부산 영도를 조차(租借)해 극동함대의 석탄 공급기지로 삼으려는 러시아의 침략야욕을 규탄하고 친러정부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이미 1월초에 러시아 수병들이 영도에 상륙하고, 한국의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한러은행까지 개설된 후였지만 독립협회는 이를 방관만 할 수 없었다. 고종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으나 정부가 조차를 허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독립협회가 부득이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다.

 

월남 이상재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민중들의 항의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이승만 등 청년 연사들은 열변을 토해 민중들의 뜨거운 지지를 이끌어냈다. 참가자들은 이미 허가한 러시아 저탄소 조차를 취소 할 것과 한러은행의 철수를 요구했고, 고종과 러시아는 만민공동회에 충격을 받았지만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역사 이래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연 대중 정치집회가 목적을 성취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러나 고종과 조정은 두 달 뒤 서재필을 추방하고 7월에는 전국의 보부상을 하나로 묶은 '황국협회'를 발족시키는 등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후 10 28일부터 6일간 열린 제2차 만민공동회는 집회에서 채택한헌의6(獻議六條)’ 결의안을 고종에게 전달해 고종 스스로 5조를 덧붙여 재가 공포토록 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고종은 익명의 역모 고발사건을 빌미로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독립협회 혁파령을 내리며 맞섰다. 만민공동회의 좌절이었다.

 

서재필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