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0일

도산 안창호 선생 별세

산풀내음 2017. 1. 7. 19:30

1938 3 10,

민족의 별, 도산 안창호 선생 별세

 

 

1938 3 10일 밤 12. 구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는 평생을 항일 구국운동으로 일관해온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 독립정신의 화신이자 민주주의의 선구자요, 위대한 정치가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향년 60세를 끝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친 것이다. 평생 신명을 바쳐 목마르게 기다리던 조국의 광복을 불과 7년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태어난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열여섯 살 때 평양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접하고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도산은 19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고,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도산이 독자적인 사회세력을 결집하여 주도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미주의 교민사회에서 공립협회를 만든 다음부터였다. 1902년 유학을 위해 도미하여 그곳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공부를 포기하고 교민지도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초창기 미국 교민사회에서 대중적 지도자로서 성장해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공립협회는 1905 4월에 창립되어 도산이 귀국하기까지 직접 이끌었던 2년 미만의 단기간에 600명의 회원을 모았다.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한인들의 권익 증진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 노력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

 

도산이 미국에 있던 5년 동안 국내정세는 날로 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7년 초 귀국 길에 올랐다. 이 때 그의 가슴 속에는 새로운 목표와 방법론과 조직형태가 그려져 있었다. , 민주공화국가건설(民主共和國家建設)이라는 민족운동의 목표와 독립전쟁준비론(獨立戰爭準備論)이라는 국권회복의 방법론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안이 그것이었다.

 

귀국 즉시 도산은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갑 등 국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찾았다. 그는 새로운 구상을 설명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신민회(新民會)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도산은 신민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가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교육, 언론, 산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게 하였다.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 당할 때까지, 3년간 그가 주도했던 신민회운동은 비록 나라를 지키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일제하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국내가 일제의 지배 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도산은 해외에 사는 교민들이야말로 현실적인 독립 운동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흥사단은 국내에서 그가 세웠던 청년학우회의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훈련단체였다. 흥사단은 미국에 본부를 두었는데, 31운동 후에는 중국과 국내에도 회원을 확보하고 활동을 전개했다.

 

1919 5월말 상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그곳에도 이미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도산은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도산은 첫 각료로 취임해 국무총리 대리를 겸하면서, 아직 명의상의 정부에 불과한 임시정부의 실체를 갖추는 데 전력을 쏟았다. 각지의 인물들을 불러 모았으며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운동 방략 작성을 주도했다. 그러나 임정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할 이승만과 이동휘 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다. 도산의 적극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동휘가 임정을 떠났으며, 이승만도 미국으로 가버렸다. 도산은 임정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전체 독립 운동가가 한번 크게 모여 다시 의견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임정을 사퇴하고 국민대표회 개최를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 새정부창조론, 임정개조론, 현상고수론 등으로 갈려 끝내 유회되고 말았다.

 

1919 10 11,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1926 5월 말 다시 상해로 간 도산은 이제 좌우 합작의 대독립당운동(大獨立黨運動)에 앞장섰다. 도산의 주도로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한동안 활발히 추진되다가 실패로 끝나, 1920년대 말 중국에서의 한국독립 운동계는 결국 민족주의자들의 한국독립당과 사회주의자들의 한국 독립운동자동맹으로 나뉘어지고 말았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도산은 오래 기다리던 기회가 오고 있다고 판단하여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대일전선 통일동맹을 추진하던 그는 윤봉길 의거의 여파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도산은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 3 10일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서 만 59 4개월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