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1일

나눔을 실천한 유일한 박사 사망

산풀내음 2017. 1. 8. 07:47

1971 3 11,

나눔을 실천한 유일한 박사 사망

 

 

한국기업사에 모범을 남긴 유일한 박사가 1971 3 11일 사망했다. 향년 75세였다. 유일한 박사는 일찍부터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기업경영으로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한 `위대한 민족 기업가`로 평가 받고 있다.

 

유일한은 조선 평안도 평양부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과 김기복(金基福)사이의 6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4, 당시 9살에 불과한 나이에도 아버지 유기연은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라'는 당부와 함께 당시 일반적인 일본 유학 대신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낸다. 


미국으로 건너간 유일한은 서재필 등과의 교분을 통해 민족주의자로 성장하였고 16세의 때에는 '한인 소년병학교'에 들어가 학업과 군사활동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미시간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고등학교 졸업후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그는 1922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자, 유일한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했다. 1925에는 서재필과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후에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대학 미식축구부 시절 사진. 센터가 유일한.

 

1926에 귀국한 유일한은 '건강한 국민만이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 경영 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일 때문이었다. 부모는 큰 아들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은 그렇지 못했고 전염병이 돌면 걷잡을 수 없이 죽어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민중작가 최서해소설 탈출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굶주림으로 죽어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1946년 귀국 후 가족사진

그의 숭고한 뜻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왔던 딸 「유재라」씨도 지난 1991년 세상을 떠나며 힘들게 모아 두었던 전 재산을 사회를 위해 쓰도록 기증하였습니다.

 

초창기에는 결핵, 학질, 기생충 등의 약을 미국 등에서 수입하여 팔았다. 수입 판매의 한계를 느낀 유일한 박사는 자체 약품개발을 결심하였고 그 1호가 1933년 개발된 '안티푸라민'이었다. 한때 가정 상비약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안티푸라민의 개발에는 사실상 코넬의대를 졸업하고 당시 유한양행 건물 2층에서 소아과 병원을 개업해 남편의 뜻을 아낌없이 지원했던 부인 호미리 여사의 공로가 컸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경영을 실천하였다. 그 이유는 라초이사 경영을 하던 시절, 거래하던 녹두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한 것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탈세하지 않았으며, 모르핀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간부사원의 유혹을 '당장 회사에서 나가시오'라는 꾸짖어 물리친 일화는 유명하다. 


여기에 더하여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박정희의 정치자금 요구를 끝내 거절한 일화도 있다. 사내에서는 적당히 정치세력과 타협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는 끝내 부정한 유혹을 거부했다. 화가 난 박정희는 유한양행에 대한 기업 세무조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털어도 털어도 먼지 하나 나지 않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약품의 성분까지 조사를 하였지만 어떠한 꼬투리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박정희는 유일한 박사에게 1968년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1938 10 29일과 30, 동아일보에 게재한 유한양행 기업광고

 

1936년 유한양행은 한국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였고, 1962년에는 경성방직에 이어 한국 기업사상 두번째로 제약업게 최초로 주식공개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9년에 이미 2세에 대한 경영권 상속을 포기하고 전문경영인에게 사장직을 물려주었다. 그의 사후 공개된 유언장에는 자신의 소유주식을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쓰도록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어 많은 이들을 숙연케 했다.

 

 

유일한 박사의 경영철학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 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 배출하며, 


기업이익은 

첫째,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 정직하게 납세하며

세째,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한다."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

 

1.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2. 딸에게는 학교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중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그 어린 학생들이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3. 내 소유 주식은 전부 사회에 기증한다.

4. 아내는 딸이 그 노후를 잘 돌보아 주기 바란다.

5. 아들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