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1일

무소유의 가르침을 남기시고 법정스님 입적

산풀내음 2017. 1. 8. 08:03

2010 3 11,

무소유의 가르침을 남기시고 법정스님 입적

 

 

 

 

법정(法頂, 속명 박재철(朴在喆), 1932 11월 5 ~ 2010 3월 11)대한민국불교 승려이자 수필가이다.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해 왔다.

 

 

 

 

1932 11월 5전라남도 해남 우수영(문내면)에서 태어나 우수영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6년제 였던 목포상업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전남대 상대에 입학하여 3년을 수료하였다. 그는 당시에 일어난 한국 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교 3학년 때인 1954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오대산으로 떠나기로 했던 그는 눈길로 인해 차가 막혀 당시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된다. 효봉 스님과 대화를 나눈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다음 해에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1959 3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9 4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강원도 산골의 주인 없는 오두막을 빌려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그야말로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실천하셨던 스님은 우리 시대 가장 순수한 정신으로 손꼽혀 왔다.

젊은 시절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희를 결성하고,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할 만큼 시대의 잘못을 아프게 고민하시면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셨고 ‘무소유’와 ‘맑고 향기롭게’를 스스로 끊임없이 실천하셨던 스님이다.

 

법정 스님은 수필집버리고 떠나기’, ‘무소유’, ‘산방한담(山房閑談)’, ‘아름다운 마무리’, ‘산에는 꽃이 피네 20권이 넘는 대중저서를 출간해 불교계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97년 창건한 길상사에서는 2003년까지 회주를 맡기도 했다.

 

1997 12월 14에는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한국 천주교 성직자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자, 이에 대한 답례로 1998 2월 24명동 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져 종교간의 화합을 보여 주었다. 법정스님은 천주교 수녀원과 수도원에서도 자주 강연했고, 그의 산문집과 경전번역서들은 수녀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초기불교 연구로 유명한 일아 스님 등 일부 수녀 출신 비구니 스님들은 법정스님의 저술에 감명을 받거나 법정스님과 만난 후 비구니가 됐다는 출가 이력을 소개한 바 있다.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신자 1800여명 앞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한 종교인의 자세'라는 주제의 특별강연을 열어 '무소유'의 정신으로 당시의 IMF 경제난국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또한 법정스님은 2000 428일 봉헌된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의 제작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조각가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겨 또 한번 화제가 됐다. 덕분에 지금도 길상사 마당에 선 관음보살상은 성모마리아의 모습을 닮았다.

 

 

 

법정스님은 2000 428일 봉헌된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의 제작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조각가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겨 또 한번 화제가 됐다. 덕분에 지금도 길상사 마당에 선 관음보살상은 성모마리아의 모습을 닮았다.

 

법정은 '사후에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그의 저서들은 모두 절판, 품절 되었다. 그 후 그가 쓴 책들의 수요가 늘어 일부 책들은 가격이 10만 원 가까이 치솟을 만큼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저작권자가 절판 유언을 남겼더라도 출판권은 출판사에게 있기 때문에 더 출판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왔으나 3월 22, 법정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들은 그의 유언을 존중하여 모든 책을 절판하기로 합의하였다.

 

생전에도무소유를 강조하던 법정 스님은사리를 찾지도, 탑을 세우지도 말라.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법정 스님은 지난 2007년 폐암으로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2009년 재발해 그 동안 삼성서울병원에서 투병해 오다가 이날 서울 성북동 길상사로 거처를 옮겨 열반에 들었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어디 있는가

모두 한 때일 뿐

그러나 그 한 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 법정 스님 -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澈底空 幻身生滅亦如然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생겨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흩어짐이라

구름의 바탕을 꿰뚫어보면(澈底) 실체가 없듯이()

실체 없는 몸뚱이(幻身)의 나고 죽음도 이와 같구나

 

 

 

 

송광사를 나서는 법정스님 다비 행렬 (201.3.13)

 

 

법정스님 다비식(2013.3.13)

 

법정스님과 인연을 맺은 수많은 분들 중 세분과의 인연 이야기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많이 시청해 주십시요

 

https://www.youtube.com/watch?v=iN-FMLFgvO8&t=21s

 

길상사와의 인연

 

본래는 '대원각' 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 ~ 1999, 법명 길상화)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김영한은 일제 시대의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김영한 보살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

 

 

 

김영한이 평생 연모한 시인 백석, 당대의 '여류 삼인방'이라 불린 노천명, 최정희, 모윤숙도 백석에 대한 연정을 품었다고 알려졌다. 노천명의 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백석을 가리켰다.

 

1987년 처음 김영한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법정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고 이에 법정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95 6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며 처음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 등록되었고 같은 해 2 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이 취임하였다.

 

김영한은 평생 백석의 생일인 7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김영한의 대원각 재산은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영한은 "천 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1999 11 14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영한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사찰의 창건주였던 법정은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고, 김영한 사후에도 길상사에서 정기법회를 열었으며, 2010 3 11일 길상사에서 78(법랍 54)로 입적하였다. 또한 길상사의 개원법회가 열리던 1997 12 14일에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법회에 참석해 법정과 함께 나란히 축사를 했고 법정 또한 이에 답하여 1998 2 24일에 명동성당을 찾아 법문을 설법하였다. 길상사 경내에는 공덕주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법정의 영정과 그 생전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등의 전각이 있으며 행지실, 청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가 존재한다. 2011년 이후 덕운이 주지로 취임하였으며, 불교 자선재단 맑고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길상사의 주지가 맑고향기롭게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또한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예술가인 최종태가 건립한 것으로, 같은 조각가가 혜화동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아 있다.

 

 

 

 

 

 

 

 

 

이해인 수녀께서 법정 스님께 보낸 추모글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 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 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 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 입니다

 

한밤중에 일어나

(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 달로 떠오르십시오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2010 3 13일 이해인 수녀가 성 라자로마을 부속 성당에서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작별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일아스님과 법정스님의 인연

 

 

 

 

 

일아 스님은 처음에 수녀였다. 지금처럼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아니었다. “서울여대에 다닐 때부터 목이 말랐어요. 영화에도 미쳤었고, 음악에도 미쳤었죠. 한때는 모든 팝송을 다 외울 정도였죠.” 그렇게 문학과 여행에도 미쳤었다. “그런데도 목이 말랐죠. 그걸 통해선완전한 인간에 대한 갈망이 채워지질 않더군요.”

 

그는 고민했다. ‘시집을 갈 거냐, 수도자가 될 거냐.’ 결국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비구니 스님은 머리를 빡빡 깎잖아요. 그게 너무 낯설었죠. 그래서 수녀가 되기로 했어요.” 집에선 난리가 났다. 어머니는 몸져눕고, 오빠는이게 부모님께 대한 보답이냐?”며 그의 뺨을 때렸다. 유명 정치인이었던 아버지는왜 자연을 거스르며 살려고 하느냐며 호통을 쳤다. 그 앞에서 그는아버지, 저를 붙들어 매시겠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결국 그는 서울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에 입회했다. 그리고 가톨릭 신학원을 졸업한 뒤 수녀가 됐다. 그렇게 6∼7년 가량 수녀로 살았다. 그러나 종신서원을 하진 못했다. “가톨릭은 너무나 매력적인 종교입니다. 엄숙하고, 자아에 대한 절제도 강하죠. 그리고 점잖죠. 2000년간 이어온 가톨릭의 전통에는 분명 힘이 있어요. 다만 저와 적성이 맞질 않았을 뿐이죠.”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서 계속 살 수 있을까?’ 그리고아니오란 답을 얻었다.

 

그 길로 그는 수녀복을 벗었다. “막막하더군요. 딱히 갈 데도 없었죠.” 그때법정 스님이 생각났다. 사실 법정 스님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수도회 수련원에서 도서관 소임을 맡은 적이 있었죠. 그때 법정 스님 책을 많이 읽었어요. 당시 수녀님들 사이에서 법정 스님의 인기가이었죠.”

 

그는 무작정 송광사 불일암으로 갔다. 거기서 법정 스님을 만났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물었죠.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는 장소와 그걸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말이죠.” 법정 스님은 장문의 편지와 함께 그에게 조계종 비구니 특별선원인 석남사를 소개했다. 그는 석남사에서 행자 생활부터 다시 시작했다. “수도 생활은 이미 겪었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힘들 건 없었어요.”

 

행자 생활을 마치고 그는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참 궁금했어요. 기독교에선 예수님의 직설이 담긴신약성경이 있잖아요. 저는 그걸 외우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승가대학에선 부처님의 직설이 담긴 팔리어 초기 경전을 배우질 않더군요. 중국 선사들의 얘기만 가르쳤죠.” 그가 궁금한 것은붓다였다. 붓다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어땠나. 그걸 보고 싶었다.

 

결국 그는 미얀마의 마하시명상센터로 떠났다. “거기서 2년간 목숨을 걸고 수행을 했어요. 부처님 당시의 초기 불교수행법으로 말이죠. 그때 절감했어요. 불교는 정말수행의 종교구나.”

그는 태국의 위백아솜 위파사나 명상수도원에 가서도 수행을 했다.

 

그런 뒤 미국으로 갔다. 법정 스님을 찾아가 인사도 올렸다. 배웅을 하던 법정 스님은 그에게뒤돌아 보지 말고, 앞으로 달려라고 말했다. 일아 스님은 미국의 뉴욕 스토니브룩 주립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LA로메리카 불교대학의 교수가 됐다. LA갈릴리 신학대학원에선 불교학 강의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