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5일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 사망

산풀내음 2017. 2. 13. 20:54

19644 5,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 사망

 

우리에게 참 고마운 맥아더 장군이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 2처 세계대전의 그리고 한국전쟁의 전쟁영웅이었지만 트루먼과의 갈등으로 예편하였고, 1951 419일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의 연설에서 남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명언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 생애 초기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 1월 26 ~ 1964 4월 5)는 아버지 아서 맥아더 2(Arthur MacArthur Jr.)(중장 예편)와 어머니 메리 하디 맥아더(Mary Pinkney Hardy MacArthur)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아서 2세는 미군 장교로 미국-스페인 전쟁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하였고, 1900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의 군정 총독으로 재직한 바가 있었다. 어머니 메리 하디는 아들의 교육 등에 매우 억척스러운 인물로 유명하다. 어머니는 맥아드가 여자아이처럼 머리를 기른 모습을 좋아하였고 따라서 맥아더는 어릴 때 여장도 자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웨스트포인트 입학에도 관여를 많이 하였을 뿐 만 아니라 재학 내내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면서 아들의 생활에 많이 관여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군 장교 시절에도 상관들에게 아들의 승진을 위한 노력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A very young Arthur MacArthur (L) and Mrs Jean MacArthur, Arthur MacArthur and Chinese amah, Ah Cheu, in Melbourne on 21 March 1942 after their escape from the Philippines.(R)

Neil Watt, Del Ipsen and Arthur MacArthur in the grounds of the Brisbane Supreme Court building

 

 

2) 사관학교 시절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4년 동안 역대 최고 점수인 98점 대의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운동을 좋아해서 야구 선수로 활동을 하였지만, 재학 중일 때 동료관계는 다소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가식적인 성격을 지독하게 혐오하여, 마음에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이가 눈에 띄면 대놓고 지적하고 비꼬기도 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친구보다는 적을 상당히 많이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학교 폭력 문제와 관련해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지시로 의회에서 청문회가 벌어졌는데 맥아더는 폭력 피해자의 편에서 가해자를 고발하게 된다.

 

West Point is a United States federal military reservation established by Thomas Jefferson in 1802. It comprises about 16,000 acres (6,500 ha) including the campus of the 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which is also frequently called "West Point" or "The Point"

Douglas MacArthur as a student at West Texas Military Academy in the late 1890s



3) 결혼

 

맥아더는 1922년 루이스 크롬웰 브룩스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하고7년 후 이혼으로 끝났다. 1937년 잔 페어클로스와 재혼했고, 이듬해 마닐라에서 외아들 아서를 얻었다.

 

1937 Press Photo General Douglas MacArthur/Wife Jean Marie Faircloth

 

맥아더의 첫 아내는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라는 엄청난 명문가 부잣집 출신의 사회운동가인 여자였다. 당시는 사회운동 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자기 주장이 강할 거라는 편견이 매우 강한 시기였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 여자에게 맥아더가 두번째 남편이었단 것이다.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어머니 메리 하디의 입장에선 이 결혼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크롬웰 집안에서도 반대했다. 사유는 맥아더 집안의 레벨이 자신의 집안에 비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맥아더의 첫 아내는 7년 뒤(1929)에 이혼하고 1930년에 배우인 라이어널 앳윌과 결혼, 13년 뒤(1943)에 이혼한다. 그리고 또 1년 뒤 (1944) 알프 하인버그와 결혼 그러나 이 남자와도 결국 이혼한다.

 

결혼식의 경우 웨스트포인트 출신들에게는 결혼식이 대개 신랑과 교우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교 행사였다. 그런데도 그의 첫 번째 결혼식은 친구와 동료 하객이 너무 적어서 주목을 끌 정도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도 당시의 맥아드의 사관학교 시절 교우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1차 대전 참전과 예편

 

제1 세계대전 30대 나이에 42보병사단 사단장을 맡았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군 사단장 중에서 가장 많은 15번의 훈장을 수여 받을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의외로 당시 미국 유럽 원정군의 총령관이였던 조지프 퍼싱(John Joseph "Black Jack" Pershing,1860-1948)과는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 벨로 숲에서 퍼싱이 "군인은 모름지기 당당하게 서서 총을 쏴야 한다."며 미국군 수 천명을 순식간에 죽게 만든 것에 대해 맥아더가 강력히 비난한 일을 계기로 퍼싱과 맥아더는 사이가 매우 안 좋게 되었다. 퍼싱은 미국군 내에 최대 파벌을 이끌고 있었는데 1940년 대까지 사사건건 맥아더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John J. Pershing

Douglas MacArthur (1880-1964), during his command of the 42nd (Rainbow) Division in France during the First World War. Ca. 1917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자 본국으로 귀환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필리핀에서 2차례 사령관직을 맡았으며, 미국의 2개 군단을 통솔했고, 1928년에는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았다. 1918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7년 후에 소장이 된 맥아더는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대장으로 승진되었다. 군의 최고수뇌로서 그 후 5년 동안 그가 주력한 사업은 대공황의 타격으로 약해져 가는 미육군의 군사력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그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을 때는 대공황 시기라 그는 예산을 깎으려고만 하는 대통령과 의회와 대립했고, 1932년에는 보너스 군대(Bonus Army)에게 회유책을 쓰려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지시를 무시하고 보너스 군대를 강경 진압해서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고 이로 인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다.

 

General Douglas MacArthur conferring with his aide, Major Dwight D. Eisenhower about plans for evicting the Bonus Army from Washington, D.C. - 1932


The bonus army war

 

미군미국 독립전쟁때부터 참전 용사들에게 전역 후 추가수당을 지급했다. 1 세계대전 직후 참전 용사들은 1인당 60 달러를 받았는데 이건 너무 적다는 여론이 생겨났고, 하원은 이 여론에 응해 파병 군인들은 1 1.25 달러로 최대 625달러를 추가 지급하는 법안을 의결한다. 추가 지급액은 대략 36 억 달러. 관련 예산이 완성되어 돈을 지급하는 것은 1945년으로 예정되었다. 그런데 1929대공황이 터졌고, 이런 상황에서 퇴역병들은 당장 좀 더 일찍 추가 지급금을 받기를 희망하였다. 하원 의원 라이트 패트먼이 이들의 고통에 공감해 보너스를 당장 지급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후버 행정부는 원칙과 재정상의 이유로 반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퇴역병 중 일부가 워싱턴에 가족들까지 데리고 상경했고 그 수가 무려 2 5천명에 달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보너스 원정대라 불렀고 사람들은 보너스 군대(Bonus Army)라고 불렀다. 일부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시위는 한달 넘게 지속된다. 경찰관의 실수로 된 발포로 시위대 중 두 명이 사망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후버 대통령은 연방군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맥아더 육군 참모총장이 직접 나선다. 맥아더는 시위대 중 진짜 참전용사는 1할 이하이며, 나머지는 소련과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체제전복과 공산혁명을 시도하는 빨갱이 폭도라고 주장했다. 맥아더는 부관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무장 시위대 진압에 패튼 3기병대를 선두로 6대의 전차와 1개 보병연대까지 동원했다. 패튼이 지휘하는 무장병력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그야말로 싹 쓸어버렸다. 진압을 명령했던 후버 대통령도 맥아더가 이렇게 막 나가자 경악해 중지를 명령했지만, 맥아더는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유혈진압을 강행했다.

 

1935~41년에 필리핀의 군사고문과 육군 원수로서 자금의 부족을 무릅쓰고 대일(對日) 필리핀 방위군을 조직하는 데 전력했다. 1937 12월 미육군 현역에서 은퇴했다.

 

 

5) 2차 세계대전

 

제2 세계 대전중인 1941 7월에 예비역에서 소집되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함과 동시에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가 한동안 반신불수가 되는 바람에 7만여 명의 미국군과 필리핀군을 작전계획대로 어쩔 수 없이 바탄 반도로 후퇴시켜 방어전을 펼친 맥아더는 휘하 군대와 함께 적중에 고립되었다. 약속한 지원군은 오지를 않고 보급 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바탄 반도로 후퇴한지 3개월 후 루즈벨트의 명령으로 그 유명한 '언젠간 다시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라는 말을 남기며 사실상 단신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

 

General Douglas MacArthur wading ashore in the Philippines, 1944.

 

그는 곧 뉴기니에서 공격을 개시해 1943 1월 파푸아로부터 일본군을 몰아냈다. 1943~44년의 일련의 작전으로 맥아더군은 라에에서 샌사포어까지 뉴기니의 전략지점들을 장악하고, 애드미럴티 제도와 뉴브리튼 서부를 점령했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솔로몬 제도의 남태평양군은 일제히 북진해 라바울 시를 제압하고 많은 일본군 부대를 후퇴시켰다.

 

다음으로 타이완보다는 필리핀으로 진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킨 맥아더는 1944년 가을에 모로타이, 레이테, 민도로를 공격했다. 1944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되고, 4개월 후 태평양지역의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5 9 2일 그는 도쿄 만(京灣)서 항복 조인식에 승전국의 대표로 참석했다. 1945~51년에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군의 해산, 군국주의자들의 제거, 경제복구, 자유주의 헌법의 기초(起草) 등을 독재적인 면은 있었으나 효과적으로 지휘했다.

 

1945 9 2, 미주리호 갑판에서 일본에게 항복문서를 받아냄.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맥아더 장군이 서명하고 있는 장면

차렷자세로 대기 중인 쪽발이들

쪽발이가 서명할 때 개다리를 하고서 지켜보는 맥아드 장군

 

 

6) 일본에서의 군정 활동

 

일본 군국주의의 사상적 근거가 된다고 판단한 신토를 무력화시키고, 신화교육 등을 철저히 금지시켜 전쟁 도발을 막고자 했다. 그 외 일본에서의 맥아더의 탈군국주의화 정책으로는 사회주의노동운동 묵인을 통한 자본가 견제(자본가들이 군대와 협조하지 못하게 하려는 정책), 교과서 내 천황 신격화 금지 조치, 군국주의 체제의 버팀목이었던 재벌해체, 전쟁 책임이 있던 공직자 2만 명 공직추방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시도들은 시행되는 도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후 일본 사회가 다시 보수화되면서 의미가 없게 되었다.

 

30th August 1945 General Douglas MacArthur arrives at Atsugi Air Base near Yokohama to take his post as the Supreme Allied Commander of the Occupation of Japan.

맥아더와 일본왕 쇼와(히로히토), 이 사진 한 장은 패전 후의 일본인들 마음에 남아 있던 자존심과 저항의식을 완전히 상실시켰다. 당시의 일화로 맥아더 장군과 미국군이 일본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은 시점에 일본왕이 직접 맥아더를 찾아 왔는데 맥아더는 비서도 아닌 군의관이 맞이하게 했다. 최대급의 모욕을 받은 셈이었다.

 

Photograph of Douglas MacArthur, his wife, and his son, returning to the Philippines in 1950 for a visit.

 

 

7) 한국과의 인연

 

1948 초가을,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정한경(1949 1월 주일대표부 대사로 임명된다.), 김양천 비서, 김동성 공보처장, 이정순 공보국장 4명의 수행원과 함께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12일은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나서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를 시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맥아더에게 보내기도 했다. "존경하는 장군...부디 우리 국민을 도와주십시오... 지금 우리 내외는 장군의 협력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프란체스카의 편지를 받은 맥아더는 때마침 대일 청구권 관계로 대일 강경책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던 이승만에게 한-일 관계개선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위해 다시 이승만을 초청했다.

 

독재자이며 살인마인 이승만과의 만남

 

 

8) 한국전쟁

 

맥아더는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요청에 따라 개전당일부터 합참의 지시도 받지 않고 한국군지원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6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6 27,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및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는 6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

 

이후 UN군 총사령관으로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으로 평가 받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군인으로서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 워싱턴의 미국방부와 합참은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천 상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군산 상륙을 강력하게 권고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원수 계급과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서 독단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서 워싱턴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맥아더의 명예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후부터 오판을 남발하며 1950년 겨울의 대참패에 일조했다. 마오쩌둥저우언라이는 미국군이 38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지만 맥아더는 이를 무시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면 "역사상 최대의 참사"가 벌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결국 이 말은 맥아더가 바란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현실이 되었다.

 

11월까지도 맥아더는 중공군의 침투는 공군력으로 간단하게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무려 30만 명의 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매복을 완료한 상태였다. 전선의 장교들은 중공군이 이미 압록강을 넘은 것이 확실하다며 진격속도를 늦출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진격을 늦추기는커녕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을 끝내겠다며 마지막 총공격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결국 미군은 중공군 30개 사단의 거대한 포위망 한가운데로 병력을 흩어 놓은 채 걸어 들어가는 미군 역사상 최대의 실수를 범하게 된다. 195011월 말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포위 대공세로 미군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대참패를 당했다.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 is shown inspecting troops of the 24th Infantry on his arrival at Kimpo airfield for a tour of the battlefront. International News Photos, 02/21/1951

 

 

맥아더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제한전이 아닌 중국과의 전면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 제3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트루먼 행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트루먼 행정부는 38선을 회복하는 수준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할 방침이었지만, 맥아더는 만주에 대한 핵공격과 대만에 있는 국민당군의 동원까지 주장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맥아더에게 함구령을 내리지만 그는 6차례나 무시하며 독자행동을 계속했다. 맥아더가 기자회견에서 대만군의 참전을 역설하자 마침내 트루먼의 분노가 폭발했고, 결국 맥아더는 1951 4 11일 전쟁 지휘 중 파면 당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의 동료 장군들조차 맥아더의 파면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US President Harry S. Truman and General Douglas MacArthur on Wake Island in the pacific. Truman dismissed MacArthur from the Korean command a year later.

In April 1951, President Truman fired MacArthur and replaced him with Gen. Matthew Ridgeway. on April 11, Truman addressed the nation and explained his actions.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를 해임할 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맥아더가 대통령의 권한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임한 것이지 그가 바보 자식이라고 해서 해임한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바보인 것은 맞지만, 장군이 바보인 것이 불법은 아니다. 만약 그게 불법이라면 전체 장군들의 1/2에서 3/4은 감옥에 있어야 할 것이다. (I fired him because he wouldn´t respect the authority of the President. I didn´t fire him because he was a dumb son of a bitch, although he was, but that´s not against the law for generals. If it was, half to three-quarters of them would be in jail.)”

 

당시 중화민국장제스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한국 전쟁에 개입하자 타이완 해협을 건너 중국 대륙을 침공하려 했으나 미군이 타이완 해협을 막았다. 한국전쟁으로 마오쩌둥중화인민공화국내몽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고 위구르티베트를 직접 지배하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등의 반론이 있다.

 

해임 통보를 받고 10여 년 만에 귀국한 맥아더는 1951 419일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37분간의 극적인 연설을 했다. 군인에게 주어진 전무후무한 고별 연설 기회였으며 텔레비전 시대 초기의 기념비적 일화가 됐다. 박수 때문에 28번이나 중단된 이 연설을 Old Soldiers Never Die’s Speech라고 한다. 이 때 남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명언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Douglas MacArthur with son Arthur and wife Jean at the US Capitol Building, Washington, DC, after addressing a joint session of Congress, 19 Apr 1951

 

1951 422일 맥아더가 오픈카를 타고 뉴욕 브로드웨이를 지나갈 때 700만 환영인파가 몰렸다. 미처 연도에 나오지 못한 시민들은 고층빌딩 옥상과 베란다, 창가로 나와 티커 테이프(ticker-tape)를 뿌렸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차대전 이후 아이젠하워와 니미츠 같은 여러 전승 장군과 제독을 환영하는 티커 테이프 퍼레이드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대대적인 퍼레이드는 맥아더 장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고 한참 뒤에,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기막힌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였다라고 한다.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51. 4. 22. 행진 중인 맥아더, New York Parade


 

 

9) 퇴역 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처음에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해임에 관한 상원의 공개청문회가 있은 후 그 열광은 가라앉았다. 1944, 1948, 1952년에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연이어 맥아더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따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맥아더는 1952년 레밍턴랜드사()의 이사회 회장직 제의를 수락했으며, 그 후 회장의 직무를 보는 일 외에는 어쩌다 한번씩 공개석상에 나타날 뿐 뉴욕 시에서 은거생활을 보냈다. 그는 19644 5일 워싱턴 D. C.에서 타계하여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장례식은 국장(State Funeral)으로 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1962 10월 31 김종필의 방문을 받은 맥아더

General Douglas MacArthur and Mrs. Douglas Mac Arthur congratulated their 22 year old son. Arthur MacArthur in 1961, after he had graduated from Columbia. University, New York



Mrs. Jean MacArthur leaving the Capital building in 1964 with her son Arthur MacArthur after the body of her husband General Douglas MacArthur had been placed in the rotunda. The general's nephew, Douglas Mac Arthur II, former ambassador to Japan and Belgium is on the other side of Jean MacArth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