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5일

제1차 천안문(톈안먼) 사건

산풀내음 2017. 2. 13. 22:21

19764 5,

1차 천안문(톈안먼) 사건

 

1976 4 5일은 중국에서 제1차 천안문 사태(Tiananmen Square Incident 1976)가 발생한 날이다. 천안문 광장의 면적은 44만㎡에다 1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최대 규모. 38m 높이의 인민영웅기념비를 중심으로 남쪽에는 마오쩌둥(毛澤東)기념당, 북쪽엔 천안문, 서쪽엔 인민대회당이 있고 동쪽엔 역사박물관이 있다. 중국 근·현대사가 온전히 기록되는 현장이다.

 

 

흔히 말하는 천안문 사건은 ‘제2차’에 해당하며, 1989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노동자·시민들을 계엄군을 동원하여 해산시키며 사상자를 발생시킨 것을 지칭한다. 이에 앞서 1976년 사건은 중국 마오쩌둥(毛澤東) 체제 말기에 있었던 민중반란으로 중국 문화대혁명 이래의 마오쩌둥 사상 절대화 풍조와 마오쩌둥 가부장 체제에 대한 중국 국민들의 저항을 나타낸 사건이다.

 

장칭(江青, 1914-1991) 4인방 중심의 문화대혁명세력이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해 나가는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을 재차 실각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이들의 행위는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죽었을 때 후계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덩샤오핑에 대한 공격은 장칭의『수호지』비판으로 분명해졌다. 장칭은이 소설에서 송강(宋江)이 첫 번째 두령 조개(晁開)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듯 현재 당 중앙에는 마오쩌둥 주석을 무시하는 자가 있다고 발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덩샤오핑을 비판한 것이다.

 

좌로부터 장칭,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장칭은 마오쩌둥의 부인으로 4인방 중에서 최고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 권력자 부인의 입에서 나온수호지 비판은 일견 유치하게 보였지만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그만큼 4인방 주변에는 권력을 위해 기생하는 정치적 박쥐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사의 물결은 4인방이 이러한 유치한 전략을 펴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았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고 그 물결이 큰 파고로 번져 나가 담벼락을 무너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76 1 6 4인방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것이다. 그는 인민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었고, 추모식장에서 가장 친분이 두터웠던 덩샤오핑이 추모사를 맡았다. 사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인연을 맺으면서 가장 가까운 사이였고, 덩샤오핑 스스로가저우언라이는 항상 자신의 형님이었다고 『덩샤오핑 문선』에 술회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인연은 1952년 덩샤오핑이 중앙에 발탁되기 까지 야전에서 군사지도자로 활약할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그를 보살펴 주었던 인연이 있기도 하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주자파(走資派)’ 비판 운동이 일제히 일어나, 오랜 기간 신중국의 건설 및 국제 무대에서의 중국의 위신 증대에 기여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도하려던 중국 민중의 의지는 꺾이고, 다시 극좌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1976년 중국 혁명영웅을 기리는 청명절(4 4)을 맞아 천안문 광장에 고() 저우언라이 수상을 추모하는 수천 개의 화환들이 놓이고 군중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20만 명의 군중들은 1 8일에 사망한 전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를 에도하고 그 정적 ‘4인방을 규탄했다. 저우언라이를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자)로 몰아 격하하려는 극좌파에 대한 대중들의 자발적이고도 거센 반발이었다.

 

1976 4 4일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시민들

 

그러나 4 5일 새벽 1,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장칭 등 ‘4인방의 지시로 천안문 광장에 놓여있던 수 천개의 화환들이 모두 철거되고 현장에서 화환을 지키고 있던 57명이 체포됐다. 이른 아침, 밤새 일어난 일에 분노한 수 만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그 동안 저우언라이를 기리며 ‘4인방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던 사람들이었다. 흥분한 이들은 민병과 경찰 지휘부에 쳐들어가 건물과 인근에 있는 자동차를 방화하는 등 십 수시간에 걸쳐 천안문 광장을 점거했다.

 

1976 4 4일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시민들

 

그러나 4 5일 새벽 1,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장칭 등 ‘4인방의 지시로 천안문 광장에 놓여있던 수 천개의 화환들이 모두 철거되고 현장에서 화환을 지키고 있던 57명이 체포됐다. 이른 아침, 밤새 일어난 일에 분노한 수 만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그 동안 저우언라이를 기리며 ‘4인방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그들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던 사람들이었다. 흥분한 이들은 민병과 경찰 지휘부에 쳐들어가 건물과 인근에 있는 자동차를 방화하는 등 십 수시간에 걸쳐 천안문 광장을 점거했다.

 

4인방 중 장칭이 체포되어 재판정으로 들어서는 모습(), 젊은 시절 마오쩌둥과 장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