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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 장려한 첫 극영화 ‘월하(月下)의 맹서(盟誓)’ 상영

산풀내음 2017. 2. 18.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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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 장려한 첫 극영화 월하(月下)의 맹서(盟誓)’ 상영

 

한국 최초의 극영화월하(月下)의 맹서(盟誓)’ 1923 49, 서울 경성호텔에서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1백여 명을 초청하여 처음 상영됐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제작한 계몽영화다 보니 극장에서 개봉되지는 않고 각 지방의 공공기관에서 상영되었다. 그리고 계몽영화라 스토리는 단순하다. 약혼녀 정순(이월하 분)이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에 내려와 주색잡기에 빠져 파산직전에 놓인 약혼자(권일청 분)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혼인을 앞둔 어느 달 밝은 밤에 미래를 다짐하며 저축할 것을 맹세한다는 내용이다.

 

각본을 쓰고 감독한 사람은 윤백남(1888-1954)으로 동경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로 한일합방 이후 신극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해방 후 1953년에는 서라벌예술전문대학 (현 중앙대학교에 통합) 초대 학장을 지낸 바 있다.

 

 

영화가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처음으로 여배우를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여자가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지면 혀를 차고 눈을 흘길 때였지만 윤백남은 과감히 민중극단 단원이었던 이월화를 여주인공으로 출연시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갓스물의 나이에 아름다운 용모로 월하의 맹서에 등장한 이월화는 뭇남성들을 매혹시켰으며 ‘장안의 모던 걸’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누구의 딸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죽은 줄도 모르는 비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월화와 함께 극단 토월회 멤버였던 고 복혜숙 여사의 생전 회고록에서도 이원화의 확실한 나이와 출생 등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몇몇 떠도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월화는 서울 창신동 늙은 기생집 앞에 강보로 싸여진 채 버려졌으며 이를 발견한 늙은 기생이 노후를 의탁할 생각에 들여다 키웠다. 이정숙이라는 이름으로 자라난 그는 열 살 때부터 기생이 됐다. 우미관에서 즐겨 보던 활동사진에 빠진 이정숙은 기생을 그만두고 민중극단에 들어갔다가 이어 토월회의 멤버가 됐다. 여기서 월화라는 예명을 얻었다.

 

이월화는 월하의 맹서의 유명세를 업고 조선키네마 창립작품 해의 비곡출연했다. 이 영화에는 이월화에 이어 두 번째 여배우로 발굴된 신인 이채전이 출연했다. 이월화는 자신의 인기가 이채전에게 밀리자 화가 나서 윤백남의 운영전출연제의를 거절했다. 이 영화에는 역시 신인 여배우 김우연이 출연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월화는 영화 데뷔 이후 남자들과의 스캔들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인기도 로맨스도 시들해지자 일본으로 중국으로 떠돌았다. 1933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상하이에서 음독자살했다는 설과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는 설이 있다. 확인된 바는 없으나 어쨌든 자살로 생을 마감한 듯하다. 당시 이월화의 나이 2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