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8명 사형 집행

산풀내음 2017. 2. 19. 03:12

19754 9,

인혁당 재건위 8명 사형 집행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1975 4 9일 새벽 긴급조치 1-4,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8명은 여정남,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우흥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이다이들은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의 배후 세력이란 이유로 1974년 체포되어 동년 6 15일 비상군법회의 1심 재판을 거쳐, 1974 9월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은 1975 4 8일 대법원이 상고 기각 판결을 내린 지 만 19시간 만인 이날 새벽 집행됐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상고 기각 당시 대법원 재판부는 민복기 대법원장을 비롯해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 한환진, 임항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 등 13명이었다. 판결 당시 이일규 판사만이 반대의견을 냈던 것으로 전해졌다.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처형된 8

 

1972 12월의 유신 체제 발족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1973 10월부터 시위 등을 통한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이 본격화되었다이러한 와중에 1974 4월 3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는 요지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4호를 공포했다.

 

4월 25, 중앙정보부긴급조치 4호 및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1024명을 영장 없이 체포했고, 그 중 253명을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송치했다. 5월 27,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 사건 추가발표에서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으며, 이들이 인민혁명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한 것으로 발표했다. 소위 인혁당 재건위(2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이미 1974 711, 강신옥 변호사는 여정남 등이 관련된 민청학련 사건 결심공판에서 변론을 통해사법살인을 예언했다.

 

법은 권력의 시녀, 정치의 시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본인은 법의 임무는 정의를 실현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견해를 믿어왔습니다. 이번에 이 사건에 관여하면서 본인은 법의 기능에 대해 크게 실망하였고, 과연 법은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 지금 검찰관들은 나라 일을 걱정하는 애국학생들을 내란죄,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고 사형이니 무기징역이니 구형하고 있습니다. 증거도 없이 형식적 절차만으로 피고인들에게 사형까지 구형한다면 이는 우리의 기초적인 법감정인 정의의 이념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재판이어서 결과적으로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법의 이념으로 처단하려는사법살인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 변론 때문에 강 변호사가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 몇 달 뒤 대법원 판결 19시간 만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이 전격 집행되는 충격적인 사태가 진짜로 벌어진 것이다.

 

법정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비통해 하는 가족들

1975 4 9, 8명의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서대문구치소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사실 대법원 판결 이전부터 피고들에 대한 사형집행 계획은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인혁당 사건을 수사 지휘한 당시 중정 6국장 이용택은 훗날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곧바로 (사형)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국방부에 전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서울구치소의 교도관들도 48일부터 퇴근하지 못하고 대기했고, 수감자들 사이에는다음날 처형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번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피고인들의 재심 기회를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유언(사형집행 때의 최후진술)조차도 위조했다. 도예종은조국이 하루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라 했다고 보도됐지만, 입회 교도관은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한마디만 했다고 증언했다 8명 모두가종교의식을 거부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교도관들은 그런 이야기를 그 누구한테서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천주교계의 구명운동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변조한 것이다.

 

정권은 주검까지 빼앗았다. 경찰은 사형집행 다음날인 1975 410, 연미사를 올리기 위해 함세웅 신부의 응암동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의 주검을 탈취하려고 녹번동 삼거리에서 4시간20분 동안 승강이를 벌이다, 크레인까지 동원해 영구차를 강제로 끌어가 일방적으로 화장 처리했다.

 

1, 2차 인혁당 사건은 모두가 정권 차원의 조작사건이었다. 1964년의 1차 사건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박정희 군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위기를 느낀 정권이 63일 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8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획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이다'라는 발표문을 낭독했다.

 

하지만 41명이 구속된 이 사건을 송치 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최대현 검사는 95일 증거불충분으로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공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검찰총장 신직수는 당직검사 정명래를 통해 이 가운데 26명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결성 혐의로 기소했고 이에 반발해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검사는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에서도 고문에 의한 조작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면서 검찰은 재수사를 통해 추가로 구속된 1명을 포함해 13명만 국가보안법이 아닌 반공법으로 재기소함으로써 애초의 발표를 뒤집었다. 사실상 반국가단체로서의 인혁당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런데 10년 만에 인혁당 사건이 다시 등장했다. 1964년 사건을 지휘, 주도했던 당시 검찰총장이었고 현 중앙정보부장 신직수(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거쳐 1973 12월에 제7대 중앙정보부장이 됨, 1927-2001)와 당시 중앙정보부 제6국장이었던 이용택이  ‘인혁당 재건위사건을 조작해낸 것이다. 또한 중앙정보부 법률보좌관으로 신직수를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던 김기춘 역시 사건 조작에 깊숙히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차 사건의 조작은 1차 때 실패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강했다



 

신직수()와 이용택(), 우리는 이들을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한다. 출세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명은 그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전 중정 부장 김형욱의 회고록에도 재건위 사건을박정희와 이후락의 지령을 받은 신직수 그리고 그의 심복 이용택은 10년 전에 문제 되었다가 증거가 없어서 석방한 사람들을 다시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잡아넣었다고 적고 있다.

 

사람이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에 연루된 이철, 유인태, 이강철, 여정남 등을 수사한 , 민청학련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재건위의 배후 조종을 받았다고 발표한 것이다. 인혁당재건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253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다음 해인 1975 2 15 대부분 석방되었지만,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23명은 석방에서 제외되었다

 

박 대통령은 1975 221일 문화공보부를 연두 순시하는 자리에서 ‘2·15 조치로 풀려난 사람들에 대해 격앙된 목소리로 공개적인탄압지시를 했다. “이들은 긴급조치가 아니더라도 국가보안법으로 극형에 처할 수 있는 자들인데도 감옥에서 개선장군처럼 만세를 부르고 나왔다”, “민청학련 사건은 이들(인혁당)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 명백한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이를 부인하고 이들을 동지니 애국인사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도 법에 안 걸리는가, 법무부와 중앙정보부는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합법적인 정부를 뒤집어 엎으려 했다면 내란음모죄이고 이는 어느 나라 법에서든지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등등등. (한겨레, 2011 11 14)

 

국제법학자협회에서 사법 암흑의 날로 규정한 1975 4 9일에 전격 처형된 8명을 비롯해 이 사건으로 전창일, 김한덕, 나경일, 강창덕, 이태환, 이성재, 유진곤 씨가 무기징역을, 김종대, 정만진, 조만호, 이재형 씨가 징역 20년을, 이창복, 황현승, 임구호, 전재권 씨가 징역 15년을, 장석구 씨 등이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이들 중 장석구 씨가 1975 10 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1982 3 2일 형 집행정지로 유기수 석방, 8 15일 무기수 20년으로 감형, 12 24일 형 집행정지로 20년 형 유기수 석방 등의 조치를 통해 출소했다. 그러나 출옥 후 전재권, 유진곤 씨가 지병으로 병사했으며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박현채 전남대 교수가 95년 사망했다.

 

유가족들의 삶은 정말 비참한 그 자체였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중정 요원들은 물론이거니와, 더욱 가혹하게도 가는 곳마다 '간첩의 집안'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다녔다. 예를 들어, 사형당했던 희생자 하재완 씨의 막내아들은 4살 때 동네 아이들이 자신을 새끼줄로 목에 매 끌고 다니며 당산나무에 묶어 놓고 '빨갱이 새끼는 총살해야 한다'며 놀리고 이른바 '총살놀이'를 했다고 한다. 소풍날에는 반 아이들이 몰려와간첩의 자식이라며 도시락에 개미를 넣고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혁당 희생자 송상진 씨 가족의 경우, 아내가 죄책감에 자식들과 함께 '쥐약을 먹고 죽으려고까지 했다. 그 모습을 친정 어머니가 우연히 보고 말렸지만, 그 친정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깊은 충격에 빠져 몇 년 뒤 돌아가셨다고 한다. 송상진의 아들 송철환 씨는 '정말 학교 가기 싫었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의 나날'이라고 증언했었다.

이런 식으로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사회로부터 멸시와 수모를 겪은 채로 살아왔다.

 

결국 2002 9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이 사건이 일부 조작된 정황이 밝혀졌고, 유족들은 12월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사법부 내에서도 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2005 다시 재판이 시작되어 2007사형 선고가 내려진 8명에게 증거 불충분에 의한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2012. 9. 12. 인혁당 사건 유족 들이 영정을 들고 박근혜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인혁당 사건, 김기춘을 통해 본 법이란? 

http://blog.daum.net/gmania65/1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