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4월/4월 9일

한국 여자탁구 유고 사라예보에서 세계 제패

산풀내음 2017. 2. 19. 03:02

19734 9,

한국 여자탁구 유고 사라예보에서 세계 제패

 

한국은 개인전보다 단체전에 주력했다. 단체전은 일본과 한국, 중국이 우승을 다투는 3파전 양상이었다. 4단식 1복식으로 진행되는 단체전에서 한국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단식에, 이에리사-박미라 조를 복식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에리사는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사실상 팀의 에이스였다.

 

2개 조로 나뉘어 풀리그를 벌여 각 조 1, 2위를 차지한 4개 팀이 결승리그에 진출하는 예선리그에서 한국은 중국, 루마니아, 서독, 스웨덴, 프랑스, 유고와 함께 B조에 속했다. 한국은 첫날 루마니아를 3-0으로 제압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분위기를 탄 대표팀은 둘째 날 서독과 스웨덴을 각각 3-0으로 눌러 3연승을 달렸다. 3일째에도 프랑스와 유고슬라비아를 역시 3-0으로 나란히 이겼다. 5연승을 하는 동안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는 완벽한 경기력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중국전이 고비였다. 결승리그 진출은 이미 확정됐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예선리그에서 겨룬 팀은 결승 리그에서 다시 싸우지 않고 예선리그 성적을 그대로 반영하는 대회 규정상 중국전은 우승을 위해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나란히 5연승으로 1, 2위인 한국과 중국의 대결은 마치 결승이나 진배없는 중요한 경기였다.

 

1973 4월 유고 사라예보. 한국은 중국을 맞아 첫 단식에 이에리사를 내세웠다. 상대는 세계랭킹 2위 정희영. 정희영은 전진속공형으로 중국팀에서 가장 강한 선수였다. 19세 소녀 이에리사는 이상할 만큼 가라앉은 기분으로 테이블에 섰다. 상대는 아무도 넘볼 수 없었던 중국. 그러나 자신이 있었다. 이에리사에겐 드라이브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파워 드라이브를 여성들도 배우는 시기였고 이에리사는 그 선봉이었다. 이에리사는 1세트에서 자신의 주특기인 루프 드라이브를 앞세워 속전속결로 빠르게 승부를 걸어갔다. 1세트는 이에리사의 전략이 먹히면서 21-15로 가볍게 승리했다. 정희영은 2세트에서 이에리사의 드라이브를 봉쇄하기 위해 빠른 쇼트 공격 위주로 맞섰다. 결국 정희영이 21-18 2세트를 따내면서 경기는 3세트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3세트에서 이에리사는 시간차 공격과 빠른 3구 공격을 통해 상대의 흐름을 뺏어와 20-15까지 앞섰다. 경기는 거의 끝난 듯했다. 하지만 서브권 5개를 가진 정희영은 빠른 서브로 이에리사의 백핸드 쪽을 공략했다. 정희영은 3구에서 연이어 스매싱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점수는 20-19, 한 점 차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에리사는 마지막 포인트를 따내며 21-19로 승리해 세트스코어 2-1 1단식을 따냈다.

 

첫 단식에서 기선을 제압한 한국은 2번째 게임에서 셰이크핸드 정현숙마저 지난 대회 세계 선수권자 호옥란을 제압해 2-0으로 승리를 눈앞에 뒀다.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였지만 한국 선수들이 잇달아 승리를 거두자 ‘코리아’라는 응원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에리사-박미라 조와 중국의 정희영-장립 조의 3복식 대결은 초반부터 난타전이 벌어지며 혼전이 거듭됐다. 그러나 한국은 아깝게도 듀스 끝에 20-22로 첫 세트를 놓치고 2세트마저 내줘 복식 경기를 내줬다. 이에리사는 4단식에 다시 나섰다. 상대 선수는 호옥란이었다. 이에리사는 강한 드라이브와 스매싱으로 페이스를 유리하게 이끌어 1세트 21-15, 2세트 21-18로 세트스코어 2-0의 완승을 거뒀다. 중국의 두 에이스 모두가 이에리사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한국은 이날 승리로 1승을 안고 결승리그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은 다음 날 A 2위 헝가리를 3-1로 격파했다. 이제 남은 경기는 지난 대회 준결승에서 패한 일본뿐이었다.

 

4 9일 일본과의 마지막 대결은 결승리그 전적 2승인 한국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결승리그에서 중국에 패해 11패가 된 일본이나 21패의 중국보다 앞서 있었다. 1단식은 이에리사와 일본 랭킹 1위인 요코다의 대결이었다. 에이스의 맞대결이었다. 이에리사는 초반 긴장한 탓인지 연이어 실수를 범했지만 점차 자기 페이스를 되찾으며 롱드라이브와 쇼트로 요코다를 쉽게 제압했다. 이에리사는 단숨에 두 세트를 이기며 1단식을 따냈다. 2경기는 반대로 한국은 수비형 선수 정현숙, 일본은 공격형 선수 오제키를 내세웠다. 정현숙은 쇼트 커트로 상대의 공격을 봉쇄하면서 날카로운 반격을 펴 초반부터 계속 리드를 잡았다. 그러나 ‘촉진 룰’에 걸리면서 더 이상 수비 위주의 경기를 할 수 없게 된 정현숙은 19-21 1세트를 내준데 이어 2세트도 20-22로 아쉽게 패했다.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결승에서 당시 19세였던 한국의 이에리사가 일본의 요코다 사치코를 상대로 경기를 펼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3복식은 이에리사-박미라 조가 요코다-오제키 조와 맞섰다. 최고의 컨디션을 보인 이에리사는 박미라의 도움을 받아 연신 강한 공격을 날렸다. 이에리사-박미라 조는 단숨에 두 세트를 따내며 3복식을 따냈다. 이미 한국의 우승은 확정됐다. 이에리사는 4단식에서 2년 전 준결승에서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오제키에게 세트스코어 2-1로 이겨 3-1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마지막 이에리사의 스매싱이 성공하는 순간 한국 선수단은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한국 선수단에게 쏟아지는 박수와 선수들이 흘린 눈물로 경기장은 뜨거웠다. 언론은 ‘사라예보의 기적’이라며 선수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복식에서의 이에리사

 

여자탁구팀은 1973 4 9일 세계탁구선수권 여자 단체전에서 건국 이후 첫 구기종목 우승의 쾌거를 이루며 영광의 코르비용컵을 안았다. 가난에 찌든 국민들은 밤새 지지거리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고, 현장 취재기자는 국제전화로 낭보를 전하다 끝내 목이 메고 말았다.

 

여자 단체전 패권을 차지한 한국 여자탁구팀의 천영석 감독이 영광의 코르비용컵을 높이 쳐들고 있다. 좌측엔 2위를 차지한 중국팀, 우측엔 3위를 차지한 일본팀, 4위를 차지한 헝가리 선수단이 서있다.

 

귀국한 공항엔 30만 시민이 선수단을 환영 나왔고 오색 꽃종이로 덮인 하늘 아래 선수단은 오픈카로 시내를 누볐다. 동네 탁구장은 제2의 이에리사, 2의 정현숙을 꿈꾸는 코흘리개들로 넘쳤다. 전국은 탁구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가히 탁구는 국기가 되었다. 사라예보는 아직도 살아 숨쉬는 한국탁구의 신화이다.